난세의 영웅을 기다리는 美 극장가

블록버스터들 개봉 앞두고 장밋빛 캠페인

2021.05.24 페이스북 트위터

'코로나19로 인해 초토화된 극장가를 살려줄 구세주로 떠오르는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


제53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던 날, 배우 매튜 매커너히가 등장하는 공익광고 한 편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소탈한 모습으로 극장 앞에 선 그는 극장에서 일하는 15만명의 직원들을 숨은 영웅들이라 치하하며 “이들 덕분에 극장이 돌아옵니다”라고 강조했다. 미국 영화 협회와 극장주 연합이 함께 만든 이 공익 광고엔 2021년 기대작 클립들이 포함되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인 더 하이츠' 등 작년에 개봉하지 못한 대작 영화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5월19일엔 할리우드 영화계 종사자들이 모여 ‘대형 화면이 돌아옵니다(The Big Screen is Back)’이란 슬로건 아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대면 콘퍼런스를 치렀다.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시즌을 앞두고 관객들을 극장으로 모으기 위한 각종 아이디어가 공유되고 희망의 언사들이 오갔다. OTT 서비스와 차별화를 위해 극장의 ‘대형 화면’을 극장가 컴백 캠페인의 키워드로 선택한 셈이다. 업계는 5월 말 국경일 연휴에 개봉하는 디즈니의 '크루엘라'와 파라마운트의 '콰이어트 플레이스 2'가 대작영화의 관객몰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북미 박스오피스는 2020년에 전년 대비 80퍼센트가 하락했고, 2021년이 반이 지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예년 같은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세계 흥행 기준 지표로 통했던 ‘북미 박스오피스’의 존재감이 흐려진다. 백신 접종과 함께 극장 재개관이 가속화되어서 북미 전체 극장 중 64퍼센트 이상이 문을 열었지만 관객 점유율 회복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미국 관객들이 정말 극장에서 영화를 보지 않을까? 스트리밍 플랫폼과 극장에서 동시 공개된 '고질라 VS. 콩'이 판데믹 이후 북미 최고 흥행을 기록했을 때 할리우드는 다소 희망에 휩싸였다. OTT 공개와 극장 개봉이 같은 날 진행돼도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 극장을 방문한다는 반증이 되었기 때문이다.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별다른 홍보 없이 개봉되어 외국어 영화로서 최고 오프닝 성적을 기록했을 때도 미래는 핑크빛이었다. 그뒤 5월 16일까지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영화는  '쏘우'의 아홉번째 속편인 '스파이럴'로 주말 동안 875만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그런데 정작 영화사는 그 두 배 정도의 수익을 예상했다. 2위는 가이 리치 감독과 제이슨 스타뎀의 액션영화 '캐쉬트럭'이지만 2주간 수익을 합쳐도 1500만 달러가 넘지 않는다. 2019년 비슷한 시기에 흥행한 영화들이 하루에 기본 10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것에 비하면 참으로 약소한 수치다.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번 개봉이 연기됐던 마블의 '블랙 위도우'. 사진제공=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그러나 OTT 플랫폼을 소유하고 있는 메이저 영화사들은 박스 오피스 수치에 그리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있다. 디즈니는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인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크루엘라' '블랙 위도우'를 구독료 외에 30달러 추가 지불하는 ‘프리미엄 액세스’로 공개하고 동시에 극장 개봉도 추진한다. 반면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프리 가이'와 마블 신작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극장에서만 공개하고 45일 뒤에 다른 플랫폼으로 감상이 가능하도록 극장과 계약을 맺었다. 워너브러더스 또한 HBO 맥스에서 '원더우먼'을 시작으로 올해 모든 개봉 영화들을 극장과 동시 공개한다. 이미 '원더우먼' '고질라 VS. 콩' '모탈 컴뱃'은 극장에서도 기대이상의 선전을 펼치며 OTT 동시 공개에 대한 우려를 낮췄다.  지난주말 한국 극장가를 사로잡은 유니버설의 초기대작인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는 미국에선 극장에서 개봉한 뒤 17일 이후 온라인 플랫폼에서 유료 관람이 가능하다.

 

관객들이 극장에서 편안하게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감상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기엔 1년 동안 대중이 영화를 향유하는 방식이 매우 많이 변했다. 미국에서 개봉한 '기생충'이 파죽지세로 극장을 장악하며 관객을 모았던 2019년 말의 풍경은 이제 전설의 한 장면처럼 다가온다. 


극장으로 관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지니 개봉 직전에 홍보를 쏟아부으며 여세를 몰아가던 마케팅 방식도 변했다. 타인의 감상에 기댄 입소문보다 자신이 접속한 스트리밍 플랫폼의 첫 화면에 뜬 신작 리스트가 선택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북미 박스오피스만으로는 더 이상 무슨 영화가 최고 인기인지 알기 힘든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어쩌면 이제 할리우드 영화의 인기를 고스란히 반영 가능한 박스오피스의 기준은 극장이 비교적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는 한국 박스오피스가 될지도 모른다. 


이 흐름을 바꿀 게임 체인저는 어떤 영화가 될까? 마블 히어로? 007? 아니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야심찬 뮤지컬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3편 줄거리도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 '매트릭스 4'? 2021년 미국 박스오피스의 역사를 다시 쓸 난세의 영웅이 등장할 타이밍이다. 


뉴욕(미국)=홍수경 칼럼니스트 




CREDIT 글 | 홍수경(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