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오스카 영광의 순간에 더 빛난 참어른

유머와 진정성으로 모두를 웃기고 울린 수상소감.

2021.04.26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후크엔터테인먼트



대한민국의 배우 윤여정이 26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유니언스테이션과 LA돌비 극장에서 열린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배우로서는 노미네이트와 수상 모두 전인미답의 길이며, 아시아 배우로서도 역대 두 번째다. 일본의 고 우메키 미요시가 1953년 영화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이래, 무려 63년 만의 일이다.


‘미나리’의 제작자이자 전년도 남우조연상 수상자의 자격으로 시상에 나선 브래드 피트에게 “이제야 만난다. 촬영 때 어디 있었느냐”는 농담을 시작으로, 특유의 유머 넘치는 수상소감을 시작한 윤여정은 글렌 클로즈와 같은 부문 후보에 오른 동료 배우들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며 시상식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상소감의 끝자락엔 자신에게 첫 번째 영화를 선사한 고 김기영 감독에게 대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젠 고인이 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눈빛과 표정에는 연기를 막 시작했던 20대 초반의 윤여정이 서 있었다. 많은 사람이 윤여정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 넘치는 직설화법에 열광했지만, 알고 보면 연기 인생 중 가장 빛나는 영광의 순간에 윤여정은 처음 연기를 시작했던 초년병 시절로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미나리’와 함께 가파르게 달려왔던 근 1년 여의 시간. 입만 열면 나이로 인한 체력 저하를 토로하는 국민 배우에겐 화려한 조명의 소등이 어쩌면 퇴근길에 올라서는 직장인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시상식장의 뜨거운 열기에서 벗어난 윤여정은 상기된 표정으로 LA 영사관에서 한국 취재진을 만났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한국 취재진과 나눈 일문일답. 백전노장의 노련미는 여전했다. 무대 위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영어를 잘 못하지만, 그래도 더 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엉망진창이었다. 그게 창피하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분위기를 더욱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늘 한결같은 윤여정의 유머넘치는 직설 화법은 그가 들고 있는 와인 한 잔과 어우러져 더욱 향긋하고 달콤하게 퍼져 나갔다. 

사진출처=뉴스영상 캡처


#글렌 클로즈

글렌 클로즈는 윤여정과 47년생 동갑내기로 서로 다른 대륙에서 같은 시간, 같은 배우의 길을 걸어온 동지와 같은 존재. 윤여정은 이날 간담회에서 진정으로 글렌 클로즈의 수상을 바랐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글렌 클로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만큼이나 오스카와 연이 없는 배우로 유명하다. 이번이 무려 8번째 노미네이트. 하지만 매번 빈손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배우라는 직업을 ‘잠깐’의 순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지만, 윤여정은 하루에 되는 스타와 오랜 시간을 거친 배우에 대해 다른 선을 그으며 글렌 클로즈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자신처럼 오랜 시간을 연기에 몸 담은 동갑내기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다.

“글렌 클로즈를 만나 이야기한 게 좋았다. 2000년도인가, 영국 갔을 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연극에서 그를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열심이었다. 그 작품의 역할은 나이가 어려야 하는 역할이다. 그런데 그는 저와 동갑이다. 할 수 없는 배역인데 해냈다. 전 진심으로 그가 (상을) 받길 바랐다.”


#아카데미 나들이

윤여정은 진심으로 노미네이트만으로도 영광이라 말했다. 선댄스 영화제 이후 오랜 시간 보지 못한 '미나리' 스태프들을 만날 생각으로 선택한 아카데미 나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수상을 점쳤지만 당초 요행수를 믿지 않는 성격이라고. 오랜 인생 속에 배반에 의한 시련이 많았기에 더욱 그랬다. 하여 연기 인생 최고의 순간에도 엄격하게 선을 그었다. 최고에 취하지 않고, 오히려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최중’을 우선하는 대선배의 모습이었다.

“영어 잘하는 애들이 제게 경쟁 싫어한다고, 1등 싫어한다는 거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너무 1등, 최고를 중요시하지 말고 함께 살며 ‘최중’하고 싶다. 아카데미 월이 트럼프 월보다도 높다. 동양 사람에겐 참 어려운 곳이다. 최고보다는 최중으로, 모두 동등하게 살면 좋겠다. 이러면 너무 사회주의 같을까?(웃음)”

사진출처=뉴스캡처



#‘미나리’ 가족들


함께 기자회견장에 나선 한예리를 바라보는 눈엔 정겨움이 묻어났다. 평소 예쁜 말로 애정을 전하는 편이 아니기에 그 진심이 더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이번에 아카데미를 견학했으니, 다음엔 더 수월할 거라는 덕담도 안겼다. 더불어 ‘미나리’를 연출한 정이삭 감독을 향해선 “희망을 봤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평소 “이젠 마음에 드는 감독들과만 작업할 거다”라고 말하는 윤여정의 위시리스트에 깊숙이 이름을 새겨넣은 게 틀림없었다.

“대본을 본 세월이 오래다. 딱 보면 진짜 이야기인지, 아닌지 안다. 너무나 순수하고 진지했다. 기교로 쓴 작품이 아니고, 진심의 이야기였다. 그 지점이 늙은 나를 건드렸다. 하지만 제가 잘 넘어가는 편이 아니다. 감독들은 다 잘 났다. 그런데 제가 잘난체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실제로 만났는데 요즘 이런 애가 있나 싶었다. 내 아들보다 어린데도 존경한다고 했다. 내 친구들 말로는 제가 흉 안 본 감독은 정이삭 한 명이란다.”

#김기영 감독

수상 소감에서 윤여정은 김기영 감독에게 감사를 전했다. 수많은 감독과 PD와 함께 작업을 해왔지만, 그만큼 처음은 기억에 남는 법일까?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김기영 감독의 시간은 멈춰있지만 20대였던 윤여정의 시간은 70대 중반까지 흘렀다. 늘 “자신은 철이 들지 않았다” 말하지만 연륜이 쌓여감에 있어 시작을 지켜봤던 감독에 대한 생각이 사뭇 달라졌음이 당연했다. 

“영화는 감독이 중요하다. 하는 역할이 정말 많다. 영화는 종합 예술이다. 머리 좋은 사람부터 나쁜 사람까지 감독은 다 아울러야 한다. 그건 굉장한 힘이다. 김기영 감독님을 만난 건 21살 때 쯤 이다. 어렸다. 정말 죄송한 건 제가 60살이 넘어서야 감사하단 걸 알게 됐다. 감독님이 돌아가신 뒤였다. 그 전엔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싫어했다. 그래서 늘 죄송하고, 지금도 후회스럽다.”

사진출처=뉴스영상캡처


#앞으로의 윤여정과 연기 여정

자신의 연기 철학은 열등의식에서 시작됐다고, 연극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극단 출신도 아닌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연기했음을 말하는 윤여정. 그럼에도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했고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대사를 외웠다.

“대본은 내 성경이었다”는 말에 “상 탔다고 멋있게 이야기하려 한다”며 자진 검열을 했지만 윤여정이 걸어온 연기 여정을 나타내기엔 딱 맞는 비유였다.“브로드웨이에 명언이 있다. 브로드웨이 가는 길을 물었더니, ‘연습’이라고 답했단다. 연습은 무시할 수 없는 거다. 앞으로의 여정은 모른다. 난 난 점쟁이가 아니다. 살던 대로 살 것이다. 오스카 받았다고 윤여정이 김여정이 되는 건 아니다. 제겐 계획이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대사를 외우는 게 힘들다. 남에게 민폐 되지 않을 때까지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좋을 것 같다.”

권구현(칼럼니스트) 


CREDIT 글 | 권구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