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이 오스카 수상으로 깬 편견 4가지

'미나리'로 제93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

2021.04.26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후크엔터테인먼트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25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진행된 제93화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배우 윤여정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나이로 올해 75세인 노배우의 겸손이다. 

하지만 윤여정의 56년 배우 행보는 녹록지 않았다. 전성기의 여배우에서 결혼과 이혼을 겪은 후 조연으로 허리를 낮춰야 했고, 젊은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누군가의 엄마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윤여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숱한 편견을 깨왔다. 오스카 여우조연상은 그 마지막 도장과도 같은 인증이다.

#‘오스카 소 화이트’를 깨다

아카데미는 콧대가 높다. 주로 백인 배우나 감독에게 상을 주며 ‘오스카소화이트(OscarSoWhite·백인중심)’라는 오명을 썼다. 그동안 한국 작품에만 출연하던 윤여정은 그들에게 생소한 존재다. 하지만 미국 유수의 로컬 영화제를 ‘도장깨기’하듯 이름값을 쌓아온 윤여정의 영향력은 오스카에서도 유효했다.

최근 인종차별과 함께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증오 범죄가 판치는 터라 윤여정의 이번 성과는 더욱 값지다. ‘미나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 때는 심지어 외국어영화로 분류되기까지 했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웠을 법하다. 그래서 그가 여우조연상 시상자로 나와 "윤여정"이라고 호명하는 장면은 상징적이었다.

여기에 윤여정은 그만의 화법으로 화답했다.  "드디어 만나네요. 영화 찍을 때 어디 계셨어요?"


사진출처=방송캡처


#나이의 한계를 깨다

한국에서 70대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다. 누군가가 볼 때는, 오직 윤여정만이 누리는 호사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윤여정이 그의 연기 인생에 본격적인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것 역시 56세 때다. 

2003년 임상수 감독의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바람난 시어머니를 연기했다. 노출 연기까지 포함하고 있어 다른 여배우가 고사한 배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윤여정은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를 회상하며 윤여정은 "당시 집수리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나 역시 꺼려졌지만 돈이 너무 급해 결국 수락했다. 배우는 돈 필요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고 말한 바 있다. 특유의 윤여정식 화법이다.

이 때 윤여정에게 반한 임 감독은 그후 영화 ‘하녀’(2010)와 ‘돈의 맛’(2012)의 주연배우로 캐스팅했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이 때부터 윤여정의 본격적인 ‘글로벌 행보’가 시작됐다. 

이후에도 윤여정은 좀처럼 작품을 가리지 않았다. 큰 상업 영화 속 조연을 마다 않았고 저예산이 들어간 ‘계춘할망’(2016)과 ‘죽여주는 여자’(2016),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 등에 두루 출연했다. 제작비 200만 달러 정도가 투입된 독립 영화인 ‘미나리’를 작품의 사이즈만 보고 거절했다면, 윤여정의 오스카 트로피는 없었다. 

사진제공=판씨네마


#‘이혼녀’라는 편견을 깨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영화 ‘화녀’와 드라마 ‘장희빈’을 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때 가수 조영남과 결혼 후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약 10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고 조영남과 이혼했다. 1980년대만 해도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많지 않았고, 게다가 ‘이혼’이라는 꼬리표는 꽤나 길고 무거웠다. 그에게 예전처럼 큰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MBC 예능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위자료라고 받은 것이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 당시 아파트 전셋값 5500만원 중 500만원은 친정어머니가 빌려줬다"며 "돈을 벌기 위해 단역부터 다시 연기를 시작을 했다. 당시 보조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윤여정은 두 아들을 홀로 키웠다. 미국에서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 때의 경험은 향후 그의 연기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됐다. 그는 4월 중순 ‘미나리’의 북미 배급사 A24와 나눈 인터뷰에서 "내 두 아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나는 싱글맘이 됐고 그 이후 정말 배우가 된 것 같다. 나는 우연히 배우가 됐는데 ‘화녀’를 통해 명성을 얻었고 당시에는 정말 내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결혼과 이혼을 한 후 싱글맘이 됐는데 두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떤 역할이든 다 했다, 두 아들 덕분에 이 같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윤여정은 오스카 트로피를 받은 후에도 "두 아들이 저한테 일하러 나가라고 종용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제 아이들의 잔소리 덕분에 엄마가 열심히 일했더니 이런 상을 받게 됐다"고 감사함을 전하기도 했다.

#언어의 경계를 깨다

‘미나리’로 각종 영화제를 휩쓰는 과정에서 윤여정의 영어 실력과 유머가 큰 화제를 모았다. 그의 영어 발음과 화법에서 알 수 있듯 윤여정은 달변가가 아니다. 그의 영어는 쉽고 간결하기로 유명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많은 이들이 영어권에 가면 "주눅부터 든다"는 말을 하곤 한다. 윤여정은 그런 주저함이 전혀 없다. 언제나 같은 톤으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윤여정은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전하면서도 "많은 외국들인 제 이름을 ‘윤여정’라 하지 못하고 ‘여여’ 혹은 ‘유정’이라고 하는데 모두 용서해주겠다"고 말했다. 뼈 있는 농담이다. 이는 4월 초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 "콧대 높은(snobbish) 영국인에게 이 상을 받아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한 대목과 일맥상통한다.

‘미나리’ 속 윤여정은 영어를 잘 못하는 할머니를 연기했다. 그를 보며 손자는 "영어도 잘 못한다"고 타박한다. 하지만 소통은 언어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관계 역시 언어로만 맺는 것이 아니다. 윤여정은 이를 온 몸으로 웅변했다. 평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윤여정이라는 존재가 더욱 부각되는 이유다.

윤준호(칼럼니스트)


CREDIT 글 | 윤준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