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이 입을 열면 '톱뉴스'가 된다

특유의 화술과 매력으로 핫한 셀러브리티 등극

2021.04.23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후크엔터테인먼트


영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이라 할 수 있는 BAFTA가 열렸던 지난 11일  밤,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BAFTA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은 영국인들이 오랫동안 잊지 못할 순간을 선사했다. 

영국 왕실 필립 공의 타계에 대한 조의를 표하며 시작된 그의 수상소감이 “스노비시(Snobbish)하다고 알려진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인정을 해줘서 감사하다”로 이어지자 시상 배우였던 데이빗 오예로워와 식장내 군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린 것이다. ‘속물적인’ ‘고상한 척하는’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스노비시란 단어는 곧바로 SNS를 달궜다. 트위터에선 실시간으로 소감 인용과 함께 폭소 이모티콘이 올라왔고, 많은 이들은 윤여정의 말이 언급된 포스팅에 신나게 하트를 찍었다.

이 수상소감은 '인디펜던트'지가 뽑은 BAFTA 명순간 10에 들었고, 유튜브에 올라온 공식 영상 아래에는 난데없는 찬사의 댓글들이 따라붙었다. ‘재능있고, 겸손하고, 위트있고, 존경받는, 그러면서도 거침없이 할 말을 하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나도 당신처럼 나이들고 싶다.’ ‘영국인들 면전에 대고 속물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웃게 만드는 BAFTA 우승자는 처음일 듯’ ‘영국인이자 매우 속물스런 빅 팬으로 축하드린다. 필립 공도 당신의 소감을 자랑스러워 할 것’ ‘아시아 할머니의 에너지. 사랑스럽지만 할 말은 한다’ ‘오스카에서도 수상 소감으로 우리를 놀래켜달라’ ‘이 분의 소감이 궁금해서라도 꼭 오스카에서 상을 받아야 한다’ ‘스노비시가 이렇게 즐겁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인지 처음 알았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거침없으시다. 진정 여왕님!’ 등 영어 유머 댓글 경쟁이라도 하듯 윤여정의 소감에 대한 리액션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얼마 뒤 윤여정은 오해를 바로 잡으며 영국인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적절하지 않은 단어 선택했다고 사과를 표했지만 영어권 관객들은 배우가 의도치 않았던 반어적 재미를 충분히 즐긴 후였다.  

'미나리' 배급사 A24가 며칠 뒤 공개한 인터뷰에서도 윤여정의 솔직한 언변이 가감없이 드러났다. “하루종일 침대에서 머무르는 게 내 기쁨이자 취미. 아무 생각없이 TV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격리 기간을 정말 즐겼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아도 돼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침대에서 매일을 보냈다”는 말이 인터뷰의 대표 멘트로 인용되자 수많은 방구석 젊은이들이 몰려 들어 ‘말 그대로 내 모습’ ‘내 영혼의 소울메이트’ ‘완전 동의’ ‘여왕님으로 모신다’ 등의 짧은 멘션으로 공감을 표했다. 이렇듯 윤여정의 정곡을 찌르는 인터뷰나 소감이 튀어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몇 개 있다. 뛰어난 사람에게 경탄과 찬사를 보내는 ‘쩐다’와 비슷한 느낌의 속어인 ‘새비지(Savage)’를 비롯, ‘아이콘(Icon)’ ‘퀸(Queen)’과 같은 존경의 말들이다. 

사진출처=뉴스동영상 캡처


비슷한 시기에 '포브스'는 가장 최신의 윤여정 인터뷰를 공개하며 아시안 아메리칸 혐오 범죄와 관련된 그의 대답을 강조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려는 그에게 LA에 살고 있는 아들이 나이든 여자를 노리는 범죄가 늘어나고 있어 어머니가 거리에서 다칠까봐 걱정을 한다는 발언이었다. 아시아 할머니의 아이콘으로 격상한 윤여정이 미국 방문에 앞서 이런 말을 했다는 건 꽤 파급력이 있었다. 길에서 공격을 당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에 '미나리'의 순자가 겹쳐진 것이다. 아시아 혐오 범죄 관련해  코멘트를 남기는 미국내 아시안 중노년 여성이 전무후무한 가운데 윤여정의 말이 범죄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오는 25일까지 연장 상영 중인 뉴욕 ‘필름 앳 링컨 센터’ 시네마테크의 '윤여정 회고전'도 그에 대한 관심을 더욱 부추겼다.  '하녀' '다른 나라에서' '죽여주는 여자' '찬실이는 복도 많지' '미나리' 5편으로 구성된 미니 회고전이지만 윤여정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자기 영화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아낌없이 들려주며 팬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BAFTA 이후 첫 공식 행보인 이 행사에서 그는 영국인들에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며 사과의 말을 전했고 “50년간 연기를 했지만 요즘 분들은 예능프로그램 '윤식당'과 '윤스테이' 때문에 내가 요리하는 사람인 줄 안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BAFTA 이후 세간의 시선을 끄는 할머니 아이콘으로 등극했기 때문인지, 이 대화에서 공개된 영국에 대한 사과 발언도 끝나자마자 기사화가 되었다. 하물며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올림픽에서 나라를 대표해 경쟁하는 느낌이라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말조차 ‘독점뉴스’라며 '피플'에 공개되었다. 최근 ABC 아침방송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윤여정과 인터뷰를 끝낸 리포터는 “(윤여정이 미국 입국 후) 격리 중이라 혼자 샴페인을 즐긴다는데, 일요일 밤 많은 이들이 그녀를 위해 술잔을 들 준비가 되어 있다”며 윤여정의 수상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전했다.  

몇 달 동안 지속된 시상식 캠페인에서 윤여정은 특유의 매력으로 자연스럽게 미국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열렬한 반응은 시상식을 위한 스포트라이트를 뛰어넘고 있다.  '미나리' 할머니에서 출발한 관심은  윤여정 배우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바뀌는 중이다. 그녀가 한국말로 풍부하게 구사해온 진심어린 유머 감각이 영어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뻔한 말을 늘어놓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화법은 아시아 할머니 및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으며 ‘할머니 크러시’같은 현상으로 이어진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관성적이 된 온라인 대화에 지친 시기에 예상치 못한 기쁨과 영감을 주고 있다.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 시즌에 봉준호 감독이 한국어로 대화를 하면서도 수많은 어록을 남겼던 것처럼 윤여정의 어록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결혼 후 배우를 그만 두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는 것과 이혼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싱글맘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했다는 개인사는 경력단절을 겪는 여자들이 공감하는 포인트가 되었다.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은 삶이 부각되면서 오히려 타국 젊은이들이 ‘레전드( legend)’라며 그녀에게 존경과 경외의 시선을 보낸다. 어쩌면 윤여정에게 스며든다는 ‘윤며들다’는 유행어는 이제 한국 관객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닌지 모른다. 이번주 일요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이 또 ‘Savage!’를 남발하게 만들 소감의 주인공이 된다면 전 세계가 윤며들게 될 것이다. 

뉴욕(미)=글 홍수경 (영화 저널리스트) 



CREDIT 글 | 홍수경(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