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야!', 움츠린 오늘 나에게 보내는 응원가

쏟아지는 타임슬립물과 차별화되는 어른 동화

2021.04.08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KBS


내 이름이 커다랗게 쓰인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다니던 아동기 시절,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한마디로 ‘시크함’이었다. 나이와 함께 내면의 굳은살이 쌓이고, 그 덕에 어지간한 부침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철 영혼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다. 단단한 속내는 스틸레토 힐과 클러치 백, 원 컬러수트로 ‘멋진 어른’의 외형까지 완성해 주는 줄 알았다. 아마 그즈음 방송되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이 쌓여 내 머릿속 ‘어른’의 이미지가 형상된 것 같다.

 

당시 내 상상 속 어른이란 ‘유니콘’과 다름없음을, 그때로부터 20여 년도 더 흐른 지금은 알고 있다. 일단 대학 생활은 ‘좌충우돌’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시트콤 ‘논스톱’과 전혀 달랐다. 앞코가 뾰족한 구두에 발을 구겨 넣고 출근하는 건 5일 연속 밤 12시를 넘기는 회식을 견디는 것 이상으로 신체가 피곤하다는 걸 몸소 겪었다. 현실적으로 지금의 난 발 편한 운동화와 오래 앉아있어도 자세가 불편하지 않을 청바지를 입고 일하는 중이다. 내면의 격랑은 20대에도 30대에도 여전히 심장마저 부술 듯하다.

 

어린 시절 상상했던 어른과 현재 자신의 모습이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눈에 차는 모든 걸 꿈처럼 그렸던 ‘장래희망’을 현실로 이룬 사람은 몇이나 될까. 무엇보다, 세상의 주인공일 줄 알았던 내 미래가 어른이 돼 보니 그저 ‘행인1’에 지나지 않았음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때는 언제일까.

 

이제 딱 1회만을 남겨둔 KBS 2TV 수목드라마 ‘안녕? 나야!’(극본 유송이, 연출 이현석)는 20년 전 나(17살 하니, 이레)와 현실의 나이자 20년 후 나(37살 하니, 최강희)의 오묘한 동거를 그린다. 빗길 교통사고에서 하니를 구하고 돌아가신 아빠, 그에 대한 부채로 움츠린 채 살아온 37살 하니에게 과거와 같은 위험이 재연된다. 삶에 큰 미련이 없던 37살 하니는 제발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37살 하니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난 순간인 17살 시절 하니가 찾아온다.


사진제공=KBS

 

17살 하니로 말할 것 같으면 외모에 성격, 약자를 감싸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인성까지 갖춘 호수고 최고 인기 학생. 다른 친구들에게는 없는 특유의 자신감이 17살 하니를 누구보다 빛나게 만들었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타를 꿈꿨던 10대 소녀는, 삶을 위해 간도 쓸개도 내줄 것 같은 그저 그런 사회인이 된 37살 하니와 마주한 뒤 크게 실망한다. 17살 하니는 “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이런 한심한 어른이 됐나” “내 미래를 비참하고 쪽팔리게 만들었다”며 어른 하니를 향한 독설을 퍼붓는다. 어린 하니의 말이 비수가 된 37살 하니는 “나도 죽을 만큼 내 인생이 싫다” “이번 인생 망한 거, 나도 안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아빠의 죽음이 죄책감의 근원임은 밝히지 못한다.

 

극 초반 두 하니는 17살 하니를 제 시간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이들의 존재를 알아보는 잡스도령(이규현)으로부터 비 오는 날 굿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비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기다리는 비는 오질 않는다. 그 사이 어른 하니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두 하니가 함께 해결해가며, 어느덧 두 하니는 37살 하니의 잃어버린 행복 찾기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죄책감 탓에 가족들과도 멀어진 어른 하니의 아픔,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진 상처 등이 드러났다. 아빠의 사고 당시 자신의 모습을 가족들이 보는 것만으로도 아플 것을 알기에 숨기고자 했던 17살 하니의 존재. 하지만 가족들은 아빠의 부재를 모르는 17살 하니와의 만남을 통해 오히려 37살 하니의 아픔까지 돌아보고 서로를 보듬는다.

 

후반부에는 어린 시절 하니에게 도움을 받아 그를 슈퍼맨으로 기억하던 한유현(김영광)의 성장기도 담긴다. 인생을 그저 즐길 줄만 알았던 유현은 37살 하니와의 교류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갑질 연예인 안소니(음문석)는 양춘식으로 살았던 10대 시절의 악행들에 발목이 잡힌다. 처음엔 도망가려 했지만 17살 하니와의 대화를 통해 진심 어린 반성을 하고, 과거 학교폭력 가해를 인정하고 사죄해 잔잔한 감동을 안겼다.


사진제공=KBS

 

'안녕? 나야!'는 과거에서 현재로 온 내가 현재의 나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현재의 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을 치유한다는 설정의 차별성으로 또 다른 타임슬립 물을 완성했다. 이는 한동안 몰아치던 19금 드라마가 안긴 피로도를 낮추고, 시청자들을 따뜻하게 위로했다. 비록 시청률에서 재미는 보지 못했지만, 자극 없는 전개가 봄바람 같은 따뜻함을 선사했다. 

 

특히 지난 14회 가운데 “어른이란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해”라던 37살 하니의 대사는, 미래에 대한 기대만으로도 빛날 수 있던 10대 시절의 나를 돌아보고, 성인이 된 지금의 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드는 울림을 만들었다.

 

‘안녕? 나야’는 사회와 타협하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찬란히 빛나는 미래를 생각하며 꿈을 키우는 혹은 누군가와의 비교 끝에 초라한 나를 확인하는 10대를 향한 다독임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 누구에게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임을, 내 인생을 위해 신나고 가슴뛰는 일을 찾으라는 응원가를 불러준다.

 

조이음(칼럼니스트)



CREDIT 글 | 조이음(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