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리, 강호를 평정할 '연기 고수'

2021.03.14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판씨네마



'강호의 고수’란 표현이 가장 어울린다. 평소에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 관심 뒤편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성실히 해내다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팔살기를 꺼내며들며 강렬한 충격을 선사하는 모습이 무협지 속에 나오는 고수들을 연상시킨다.


개봉 후 연일 흥행 1위를 차지하는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이제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잇는 배우 한예리의 이야기다. 6년 전 출연한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자신이 연기한 은둔 무술 고수 척사광이 ‘맞춤배역’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면 위로 튀어나와 힘차게 날갯짓을 하고 있다. 한예리가 ‘좋은 배우’인 건 알지만 스타성에 있어선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디어도 이제야 한예리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조명하는 중이다. 드디어 팬들이 오랜 시간 기다려온  ‘예리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고 강력한 아카데미상 후보로 떠오르는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초반 미국 남부 지역으로 이민 간 한인 가족의 정착기를 담은 작품. 한예리는 사랑하는 남편 제이콥(스티브 연)과 함께 두 아이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 모니카 역을 맡았다.


모니카는 제이콥과 함께 서로를 구원해주자는 마음으로 미국에 이민 왔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삶은 생각한 대로 풀리지 않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 데이비드(앨런 킴)는 심장병으로 아프고 척박한 아칸소 땅을 개간해 농장을 만들려는 제이콥의 꿈은 자꾸 현실의 벽에 부닥친다. 모니카를 돕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친정 엄마 순자(윤여정)까지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첩첩산중이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소녀 같은 외모의 소유자 모니카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더 독해지고 강해질 수밖에 없다. 현실보다 꿈을 쫓는 듯한 남편과 계속 부닥칠 수밖에 없고, 아이들과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먼 타국에 와 병상에 눕게 된 친정엄마를 위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사진제공=판씨네마


한예리는 ‘삶은 위기의 연속’이라는 말을 실감시켜주는 모니카 역을 절제된 연기로 섬세하면서도 묵직하게 형상화해낸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 영화 속에서 스티브 연, 윤여정, 앨런 킴, 노엘 조와 함께 완벽한 앙상블을 이뤄내며 관객들을 1980년대 아칸소 황무지로 이끌고 간다.


한예리는 ‘연기의 고수’답게 모니카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애증부터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걱정, 친정엄마에 대한 미안함까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파편들을 관객들의 가슴에 꽂아 넣으며 이들 가족의 상황에 감정 이입시킨다. 연이은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뉴스 때문에 극장을 찾은 국내 관객들은 한예리를 재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한예리의 진정성 있는 연기에 깊은 감동과 긴 여운을 느끼게 된다. 물론 ‘미나리’에서 윤여정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그러나 50년 넘게 윤여정의 명연기를 봐온 ‘윤여정 보유국’인 대한민국 관객들을 만족시키기엔 출연분량과 비중이 작다. '본인의 실력을 10분의 1도 안 보여줬다'는 감상평이 나올 정도. 이런 아쉬움을 한예리가 충분히 만회한다.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에서 한예리는 한국적 보편적 감성을 이입하며 진한 공감과 감동을 선사한다. 한예리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하고 이제까지 그걸 표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까지 들게 만든다.


‘미나리’ 속에서 한예리의 ‘진정성’ 넘치는 연기가 가장 빛을 발한 장면은 힘든 노동에 팔을 들지 못해 씻지 못하는 남편 제이콥을 씻겨줄 때. 남편에 대한 사랑, 안쓰러움 등 모니카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또한 후반부 병원에서 데이비드의 심장이 자연 치료됐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한 모습은 관객들도 함께 기쁨의 눈물이 나올 만큼 뭉클했다.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완벽히 엄마 ‘모니카’가 된 모습이었다.


2007년 독립 영화 ‘기린과 아프리카’로 데뷔해 영화 ‘코리아’ ‘해무’ ‘극적인 하룻밤’ ‘최악의 하루’, 드라마 ‘청춘시대’ ‘육룡이 나르샤’ ‘녹두꽃’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등서 한예리는 항상 섬세하면서도 진정성 있은 연기로 수많은 관계자와 시청자들의 신뢰를 받아왔다. 화려한 스타성은 부족하지만 한예리가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작품에 신뢰감이 들 만큼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 반열에 등극했다. 연기 스펙트럼도 넓어 ‘미나리’의 두 아이 엄마, ‘해무’의 미스터리한 악녀, ‘코리아’ 북한 탁구 선수 등 다양한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소화해내 매 작품 궁금증이 들 정도로 기대를 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연기를 향한 진지한 자세는 이제까지 보여준 것보다 앞으로 더 보여줄 게 많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한예리가 ‘미나리’ 이후 결정한 차기작은 OCN 드라마 ‘홈타운’. 데뷔 이후 처음으로 ‘미스터리 악령 스릴러’라는 장르물에서 새로운 연기 도전을 펼칠 예정이다. 소속사 사람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다. ‘연기 고수’ 한예리가 본모습을 드러내고 강호를 평정하는 순간을 목도할 날이 다가왔다. 


최재욱 기자 jwch69@ize.co.kr



CREDIT 글 | 최재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