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고이 간직한 90년대 감성 ‘중경삼림’

2021.03.09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주)엔케이컨텐츠


어릴 적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때때로 큰 용기가 필요하다. 좋은 영화는 언제 보든 감동을 주지만, 어떤 영화는 그때 그 나이대에만 감응했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 ‘중경삼림’의 4K 리마스터링 재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 꽤 오래 고민했다.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감정.


1994년 홍콩을 배경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네 남녀의 이야기를 다룬 ‘중경삼림’은 홍콩에서 1994년 7월 14일 개봉하고 이듬해 1995년 9월 2일 한국에 개봉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개봉 당시 서울 관객수가 12만 명 정도였으니 극장 성적만으로는 센세이션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젊은층을 중심으로 비디오 시장에서의 인기는 뜨거웠다. 10대였던 나도 비디오로 ‘중경삼림’을 접한 이후 20대 초반까지 비디오와 DVD로 여러 번 돌려보곤 했다. ‘중경삼림’의 인기는 왕가위 감독 신드롬으로 번지며 ‘동사서독’과 ‘타락천사’에 대한 호응으로 이어졌다. 그 즈음 연극영화과를 다녔던 지인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때 영화과 학생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지. 왕가위 감독파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파.”


그렇게 인기였고 개인적으로도 열광했던 ‘중경삼림’이 재개봉한다는데 나는 왜 망설였는가. 그건 ‘중경삼림’이 갖고 있는 퇴폐적이고 탐미적인 세기말 분위기와 감정 과잉의 청춘이 어우러져 빚어낸 감성을 20여 년이 흐른 지금 마주하기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월의 흔적이 완연한 첫사랑을 만나 그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기 두려운 것처럼, 10대 시절 썼던 일기장을 들쳐 보기 전 심호흡부터 하는 것처럼. 같은 두려움을 안고 있던 친구를 꼬드겨 아무도 없는 평일 대낮에 극장에 들어섰다. 금발 가발을 쓰고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를 극단적인 핸드헬드 촬영으로 뒤쫓는 오프닝에 이어 ‘重慶森林’이라는 타이틀이 총성과 함께 한 글자씩 화면에 새겨질 때, 옆 좌석의 친구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망한 건가?


사진제공=(주)엔케이컨텐츠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이 영화는 두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경찰 223’(금성무)과 마약 밀매업자(임청하)의 이야기, 2부는 ‘경찰 663’(양조위)과 샐러드 가게 종업원 페이(왕페이, 당시 활동명 왕정문)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두 경찰 모두 연인과 헤어지고 실연의 아픔을 겪는 중이다. 만우절에 이별을 통보 받은 경찰 223은 자신의 생일이자 한 달 뒤인 5월 1일까지 연인 메이를 기다리겠다는 심정으로 메이가 좋아하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유통기한 5월 1일까지인 것으로 사 모으고 있다. 경찰 663은 자신의 방에 있는 온갖 사물과 혼잣말로 대화를 나누며 실연의 슬픔을 나누고 있고. 이들은 각각 금발 가발의 마약 밀매업자와 숏컷 헤어의 페이와 인연을 맺는다.


26년이나 된 영화인 만큼 ‘중경삼림’의 스토리를 낱낱이 열거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게다가 이 영화는 극단적인 핸드헬드 촬영과 스텝프린팅 기법으로 대표되는 왕가위 스타일의 집약체이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중경삼림’ 하면 떠오르는 OST의 향연, 그리고 사랑과 관계에 대한 아포리즘으로 점철된 명대사로 버무려진 작품. 한 마디로 90년대 감성의 ‘끝판왕’이다. 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예술성과 대중성, 새로움과 다양성이 폭발하던 대중문화 르네상스 시절의 90년대를 선연하게 기억한다. 새벽 내내 PC통신으로 영퀴(영화퀴즈)에 참여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에 전율하며, 무라카미 하루키와 영화전문지 '키노'와 '씨네21'을 꾹꾹 새겨가며 읽던 그때 감성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가 2021년에 재개봉한 ‘중경삼림’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왕가위를 좋아하지만 처음부터 ‘중경삼림’보다 ‘화양연화’가 더 취향이었던 친구는 조용한 극장 안에서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통조림에 집착하던 223이 5월 1일에 전 연인에 대한 감정을 끝내고 남긴 저 유명한 명대사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에서 꽤 힘들어 했지만 압도적인 사랑스러움을 발하는 2부의 왕페이 덕분에 기력을 차렸다. 중2 감성이 남아 있는 나는 223의 명대사를 비롯해 ‘사람은 변한다. 오늘 파인애플을 좋아하는 사람이,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 ‘실연하면, 난 조깅을 한다. 조깅을 하면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간다. 그러면 더이상 눈물이 나지 않는다’ 같은 소위 싸이월드 감성 충만한 내레이션들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사진제공=(주)엔케이컨텐츠


다행이다. 자신 안의 중2 감성, 추억과 흑역사가 공존하던 90년대 감성을 부정하지 않고 재빨리 빗장을 열면 ‘중경삼림’은 여전히 더없이 스타일리시한 영화다. 극장에서 보지 못했던 이들에겐 오랜만에 감정을 고양시켜줄 테다.


물론 그때와 달리 보이는 것도 많다. 특히 남자 캐릭터들이 그렇게나 지질지질했나 놀랍다. 223이 공중전화로 온갖 여자들에게 구질구질 전화를 거는 장면은 압권. 짝사랑하는 여자의 우렁각시 같은 귀여운 행각이라 여겼던 페이의 행동은 지금 보면 엽기적인 부분이 많아 섬칫 놀라게 된다(블랙커피를 자주 마시는 663을 위해 물에 수면제를 타는 모습 등).


그래도, 괜찮다. 금성무의 잘생김과 임청하의 멋짐, 양조위의 분위기와 왕페이의 사랑스러움은 여전하다. 이제는 보기 힘든 모습이기에 더욱 반갑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과 크랜베리스의 ‘Dreams’를 번안해 부른 왕페이의 ‘夢中人(몽중인)’은 여전히 우리를 달뜨게 한다. ‘중경삼림’은 2013년에 이어 재개봉임에도 불구하고 이 극악한 극장 불황 시대에 5일 만에 4만 명 가까운 관객을 불러 모았다. 역시 90년대 감성의 힘은 세다.


정수진(칼럼니스트)





CREDIT 글 | 정수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