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 마음 품 넓은 언니의 전성시대

'새해전야' '아이' '빛과 철' 3편 극장가 상영

2021.02.26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에이스팩토리



평소 신작이 나오면 빠지지 않고 챙겨보는 감독들이 있다. 홍지영 감독도 그 중 한 사람. 영화 ‘키친’, ‘결혼전야’,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까지 사랑과 관계에 관해 그만큼 세밀한 순간을 길어 올리는 국내 감독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늘 그의 영화에서 적잖은 위안과 감동을 받아왔다. 그의 신작 ‘새해전야’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각기 다른 사연이 놓인 네 커플의 일주일을 그린 작품. 취업, 연애, 결혼, 이별 앞에서 울고 웃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가운데서도 의외로 마음을 설레게 한 배우가 있었는데. 바로, 염혜란이다. 그가 맡은 캐릭터는 하나뿐인 동생 바라기인 예비 시누이 용미. 동생 용찬(이동휘)이 국제결혼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한 용미는 ‘새해전야’에서 가장 코믹한 캐릭터다. 첫 상견례를 앞두고 청심환 한 알을 꿀꺽 삼켰다가 목에 걸려 괴로워하고, 여러 차례 이혼한 ‘결혼전문가’ 친구(라미란)와 구수한 사투리로 주고받는 대화는 웃지 않고는 못 배긴다. 뻔한 개그 코드를 연기해도 뻔하지 않게 웃기는 염혜란을 보며 참 똑똑한 배우다, 싶었다.

 

더욱 좋았던 것은, 용미가 단순히 웃기기 위한 기능적 캐릭터로 머물지 않았다는 점. 용미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중국인 예비 올케 야오린(천두링)의 마음을 살피기 위해 사려 깊게 노력한다. 타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야오린의 외로움을 알아주는 것은 남자친구 용찬이 아닌 예비 시누이 용미였다. 마치, 딸의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엄마처럼 용미는 야오린의 눈빛과 한숨에 담긴 쓸쓸한 고민을 포착하고 조용히 지켜본다. 때로 정성 어린 마음과 다정다감한 행동은 언어의 장벽도 무색하게 만든다.


특히 용미가 외롭고 힘들다며 우는 야오린에게 “지금 외로움을 느낀다면 다 잘되고 있는 거야. 인생이 나빠 봐야 얼마나 더 나쁘겠어”라는 위로의 말을 건넬 때, 순간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축축해졌다.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로 인해 모두가 얼마간의 외로움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참 시기적절한 위로였고, 인생이 막막해지는 순간마다 떠올리게 될 장면이 아닐까 싶다. 맞다. 나빠 봐야 얼마나 더 나쁘겠나. 우리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이라 하더라도, 기대보다 더 고된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또한 함께 버텨낼 테니까.


사진제공=에이스메이커(주)무비웍스


이 대사를 말할 때 염혜란의 연기가 참 좋았다. 가끔 캐릭터 너머 배우의 진심이 보일 때가 있는데, 이 장면이 그랬다. 마음 품 넓은 언니가 관객의 고민을 헤아려주는 듯했다. 영화엔 예쁘고, 이국적이고, 사랑스러운 장면이 여럿 등장했지만 염혜란과 야오린이 처음으로 마음을 주고받은 이 장면이 내겐 가장 설렌 순간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능청스럽게 웃기는 염혜란을 보며 이 배우의 깊이와 내공에 새삼 감탄했다.

 

수많은 작품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항상 알찬 연기를 보여온 염혜란이다. 특히, 영화 ‘증인’에서 반전의 키를 쥔 미란의 연기는 소름 그 자체였다. 영화에서 염혜란은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에서 한순간 살인자로 돌변하는 인물을 무섭도록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후 그는 드라마 ‘라이브’, ‘동백꽃 필 무렵’, 영화 ‘걸캅스’에서 신뢰의 연기를 보여주며 탄탄히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 올렸다.

 

지금 극장에는 ‘새해전야’와 함께 영화 ‘빛과 철’, ‘아이’ 총 세 편의 염혜란 출연작이 걸려 있다. 비수기 극장가에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출연한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바야흐로 '염혜란 전성시대'이다. 누구나 제때가 있다는 걸 여러 배우들을 지켜보며 느꼈지만, 염혜란을 보며 다시금 깨닫게 됐다. 인생 비수기에 외로워하는 이들이라면 너무 좌절하지 말기를. 인생, 나빠 봐야 얼마나 더 나쁘겠나. ‘새해전야’와 염혜란이 건넨 진심에 다시금 밑줄을 긋는다.

 

김수정(칼럼니스트)



CREDIT 글 | 김수정(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