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심박동수를 되살려준 '아카이브K'

90년대 대중음악 황금기 재조명

2021.02.08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출처=방송캡처


뭔가 꾸준히 하지 못하고 싫증을 잘 내는 내가 그나마 지속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바로 노트하는 것이다. 주로 하루 업무를 시작하기 전 노트에 뭔가 끄적이는데, 매일 쓰지 않고,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히 기록하는 것도 아닌지라 ‘일기’나 ‘일지’라 이름 붙이기엔 뭣하다. 길게도 쓰고 짧게도 쓰고, 낙서도 했다가, 책에서 읽은 인상 깊은 구절도 베껴 적고, 가끔 간 전시회나 콘서트 티켓을 붙이기도 한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모은 노트가 벌써 10여 권. 노트 한 권을 보통 2년 정도 쓰니 20년 넘는 시간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말하자면 나만의 ‘아카이브(archive)’인 셈이다.

 

시간이 쌓이면 어떤 형태로든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누군가 그 흔적에서 의미를 길어올리고자 한다면 아카이브는 필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요일 밤 방송되는 SBS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자처한 프로그램이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라이브 무대와 영상, 토크로 기록하겠다는 야심찬 기획 의도를 갖고 있다니! 그렇게 거창한(?) 포부가 얼마나 잘 실현됐는지 궁금해 방송을 지켜보게 되었다. 첫 회부터 등장한 곡들이 모두 내 젊은 날을 관통한 것이 반갑고 한편으론 나의 한창때가 어느덧 역사로 둔갑한 것에 서글퍼 하면서.

 

그 한창때인 1990년대가 알고 보니 우리 대중음악의 황금기였단다. 돌이켜 보면 중고등학교 시절 홍콩(아! 장국영)과 서양 음악(듀란듀란과 아하)을 들으며, 그들의 앨범을 열심히 사 모았던 나는 1990년대 대학을 다니며 가요를 듣기 시작했고, 이후 가요만이 내 젊은 날의 배경음악으로 기억된다. 윤상은 내 방 벽에 브로마이드로 걸린 첫 한국 가수였고(정확히는 LP 속에 들어있던 가사지 뒷면이었다), 유영석(푸른하늘)은 대학 시절 내내 함께한 친구였다(그런데 이 두 분이 이제 나이 지긋해 MBC ‘복면가왕’에서 후배 가수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심사평을 하고 계시다니!). 그 사이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의 노래를 들으며 열광했고, 노래방에서는 김광석을, MT에 가서는 김현식과 여행스케치의 노래를 불렀고, 그때부터 듣기 시작한 이승환과 김동률, 토이의 노래를 아직까지 듣고 있다.


사진출처=방송캡처


누구나 알다시피 음악은 기억 소환의 힘이 세다. 음악을 즐겨듣던 당시의 나와 찰떡처럼 붙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음악이 들려오는 순간, 심지어 원하지 않아도 악착같이 나를 당시로 돌려보낸다. 붙잡아 두려고 애써도 자꾸 희미해지는 무음의 기억들과는 사뭇 다른 위력. 그러나 서글프게도 그 위력은 대개 젊은 날에 국한되어 있다. 나이 들며 새로 접하는 음악은 일단 감흥의 깊이가 얕고, 기억 소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멀수록 애틋한 것은 음악도 마찬가진가 보다. 혁오와 코드쿤스트도 좋지만, 결국 위로가 필요할 때 찾게 되는 것은 이승환과 (옛날)토이의 음악인 걸 보면.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나처럼 1990년대 젊은 날이 음악과 붙박이로 머릿속에 저장된 이들이라면 누구나 즐겨볼 것이다. 충분히 기억할 만하다고. 그만큼 의미 있는 음악들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어설프고 서툴렀어도 제법 괜찮았다고, 충분히 아름다웠고 좋은 시절이었다고 당시 음악과 자신의 젊은 날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병치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면서….

 

발라드로 시작한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첫 회에는 이문세, 변진섭, 임창정, 조성모, 김종국, 백지영, 이수영, 성시경, 폴킴이 등장했다. 쟁쟁한 가수들을 한데 모은 것과 당대를 주름잡던 주요 인물들의 이야기와 공연이 펼쳐졌다. 두 회에 걸쳐 발라드의 계보를 정리한 ‘아카이브K’는 90년대 나이트 DJ와 댄스 음악, 이태원 문나이트, 홍대 앞 인디뮤직을 소개했고, 앞으로 대학로 학전 소극장과 동아기획 사단, 그리고 세계를 매료시키는 K-POP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란다.


사진출처=방송캡처

 

드물게 모든 회차에 할 말이 제법 많은 시청자가 되어 뿌듯한 나는 부디 이 프로그램이 7개 주제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오래오래 더 많은 우리 가요를 아카이빙하길 바란다. 어쩌자고 주제가 그것뿐이냐고. 방송되지 않는 가수들은 대체 언제 다룰 거냐고 따지는 것은 일단 미뤄두련다. 그 모든 논란을 짐작하고도 일단 선뜻 시작한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기에.

 

얼마 전 열다섯 살 생일을 맞은 둘째 딸에게 남편이 턴테이블을 선물했다. 덕분에 LP 한 장을 사놓고 듣지 못해 아쉬워했던 딸은 음악을 틀 수 있었다. 겨울 햇살이 유난히 눈부셨던 오후, 딸과 나는 달착지근한 낮잠을 즐기듯 음악 감상을 했다. CD와 스마트폰으로만 음악을 듣던 딸아이에겐 새로운 경험이, 내겐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추억 하나가 추가됐다. 물론 나는 그날 오후의 음악 감상을 노트에 적어두었다. 그렇게 꼭 붙잡아 그 순간이 컴컴한 시간의 절벽 아래로 사라지지 않도록, 부디 앞으로 그 음악을 들으면 그 소중했던 순간이 반짝이며 소환되길 바라면서.


이현주(칼럼니스트) 

 

 





CREDIT 글 | 이현주(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