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 유아인이 많은 이야기를 하다

2020.10.20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에이스메이커(주)무비웍스


빡빡 민 머리에 후줄근한 줄무늬 티셔츠에 꾀죄죄한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 다소 살이 쪄서 망가진 듯한 유아인이 담긴 포스터가 묘하게 계속 영화를 보러가고 싶게 만들었다.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유아인의 연기는 “와”“우” 이 두 단어면 충분했다. 날씬했던 유아인이 볼록한 배를 내밀고 휘청휘청 멍한 표정으로 걸어갈 때면, 바보같고 맹한 표정으로 인상을 일그러뜨릴 때면 정말 연기 잘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게 그저 그 표정 안으로 흡수되었다.

 

유아인이 연기한 태인은 시골 가면 늘 한명씩은 있는 아싸(아웃사이더) 캐릭터다. 어느 시골이나 이런 총각들이 꼭 한 명씩은 있다. 동네 외딴 곳에 혼자 혹은 아주 단촐한 식구들과 살고 동네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머리도 안 좋아보이고 학교도 나오지 않고, 하는 일도 거의 없다. 존재감도 없고 그의 존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동네에 아무도 없다. 그리고 꼭 옷도 신발도 표정도 영화 속의 유아인처럼 입고 짓는다. 그래서 유아인의 연기가 “와”“우”였다. 저 짝퉁 크록스 샌들은 어디서 구한 거지? 시골 가면 꼭 만나게 되는 아싸 총각들은 정말로 유아인이 입는 줄무늬 티 같은 옷을 입는다. 재활용 옷 보관함에서 건진 듯한 옷이다. 시골 아싸총각들에게 ‘유아인티’라는 이름이 붙어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태인(유아인)은 노상에서 계란을 팔며 시체청소부 일을 하는 유재명(창복역)을 도와 같이 일을 한다. 말도 없고 생각도 별로 안 하고 그저 살아있으니 본능으로 사는 것 같은 총각이다. 집은 돼지우리같고 하나 있는 어린 여동생 은주와 같이 사는데, 은주도 학교에 다니지 않고 산발한 머리에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음식을 먹고 짐승 같은 모습으로 산다. 태인이나 여동생 은주나 사회 속에서 아무런 위치도 없고 어느 곳에도 속해있지 않다. 사람과 짐승 중간 경계선에 있는 것 같은 아이들이 사회가 정한 선과 악 도덕과 법의 테두리가 만든 사건에 휘말려 든다. 그리고 법과 윤리 도덕에 대해 아무런 개념과 배운 게 없으므로, 당연히 그때그때의 본능과 감정으로 대처한다.

 

이 사회가 만들어낸 법과 도덕 윤리의 개념이 ‘말’이라면, 그래서 태인은 말이 없다. 이 사회의 ‘말’들이, 태인의 ‘말 없는’본능과 감정과 부딪혀 몹시 큰 울림을 만들어 낸다. 어디서 본 적이 없는 아주 묘한 에너지와 울림이다. 하지만 이 두 부딪힘이 말없이 아주 많은 말을 한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너도 태인처럼 이도 저도 아닌채로 말에 맞추지도 못하고 또 맞추지 않는 것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다치고 데이고 치이며 겨우 생존하고 있지 않느냐고. 


사진제공=에이스메이커(주)무비웍스


이 영화는 13억원으로 만든 저예산 영화라고 한다. 그리고 유아인에겐 대사 한마디도 없고, 장편영화 데뷔가 처음인 신인감독의 작품이다. 배우로써 다소 힘든 선택일 수도 있는 걸 왜 택했을까?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알았다. 말없이 가장 많은 말을 하는 역이어서 그랬구나. 유아인이 탐낼 만하다. 그만큼 태인은 지금껏 보지 못한 아주 뜨겁고 매력적이고 생소하면서 많은 걸 담고 있는 캐릭터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유아인이 살려냈다고 말하지만, 아니다. 영화 속 태인이 유아인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기 힘든 배우로 살려냈다.

 

유아인뿐만이 아니다. 바르고 독실한 크리스천이면서도 끔찍한 살인현장을 아무 죄책감없이 의무적으로 성실하게 처리하는 강창복역의 유재명 또한 단단히 빛나는 캐릭터다. 유재명은 다리를 전다. 선한 동네아저씨지만, 또 아이를 담보로 돈을 벌려는 이기적이고 악한 이중적인 모습도 가지고 있다. 유아인이 말을 못하는 만큼 유재명은 아주 말이 많다. 혼자 많은 대사를 하는데, 대사들이 아주 재밌고 코믹하다. 또 유재명뿐 아니라, 채소 파는 할머니도, 아이인신매매단들도 캐릭터와 대사들이 재밌다. 어두운 이야기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어둡지만은 않고 밝고 코믹한 요소들도 많다.


사진제공=에이스메이커(주)무비웍스

 

‘소리도 없이’를 만든 홍의정 감독의 단편영화 ‘서식지(2017)’를 예전에 봤다. 통일이 된 한반도를 배경으로 경제대공황이 찾아온 무대를 그리고 있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도 변희봉의 독특한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소리도 없이’도 단편영화 ‘서식지’처럼 다소 어두운 것 같으면서도 밝고 코믹하고,캐릭터들이 독특하고 강렬하다. 실험적인 구성 또한 비슷하다. 하지만 신인감독의 작품으로 보기에 정말 연출이 뚝심있고 안정적이다. 강한 내공이 느껴진다. 장편상업영화치고는 근래 보기 드물게 실험적이며 열린 결말을 보여준다. 상업영화의 클리셰가 익숙한 관객들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무척 좋았다.

 

너무 많은 생각이 드는 현실을 잊어보려고 극장으로 숨어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훅 치고 들어오는 많은 생각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이 사회 어디쯤 어떤 모습으로 점찍고 살아가고 있으며, 타인이 보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같을까? 어느 정도 간격이 있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나…. 이렇듯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영화는 정말 간만이다.

 

유아인이 방향을 잃은 채 숨을 헐떡이며 그저 막막하고 절망스런 표정으로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나는 완전히 이입된 것 같다. 정말 간만에, 정말 맘에 드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가 주는 위로는, 잊고 있었던 나를 깨닫게 해주는 힘인 것 같다.


고윤희(시나리오 작가) 

 

 



CREDIT 글 | 고윤희(시나리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