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에서 청량이란 무엇인가

2020.10.15 페이스북 트위터

NCT DREAM, 사진제공=SM엔터테인먼트



케이팝 마니아들에게 청량이란 평생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그림자다. 케이팝을 사랑하는 이들은 종종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자신의 취향과 상관없이 생에 한 번쯤 스쳐 지나간 청량한 아이돌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심코 추억을 판다. 재미있는 건 이 현상이 듣는 이의 취향과 정말이지 상관없이 진행되는, 일종의 무의식적인 케이팝 연결고리라는 사실이다. 지금 아무리 세상을 부술 기세로 달려드는 강하고, 세고, 격렬한 무대를 선호하는 이라도 ‘청량’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자연스레 광대를 끌어올리며 ‘청량, 그거 좋지’하는 은은한 미소를 짓는다. 마치 50년 만에 유년 시절의 일기장을 발견한 초로의 중년처럼.

그렇게 모두의 마음속 하나쯤 숨겨둔 케이팝 청량 컨셉트에 대한 은밀한 사랑은 그러나 중요하게 언급되거나 진지한 분석의 대상이 된 적이 드물다. 파도 파도 끝이 나지 않는 심오한 세계관과 젊음과 관절을 갈아 넣어 완성한 스펙터클한 무대 사이, 청량 컨셉트는 그저 신인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 겪고 지나가는 필수요소이자 가벼운 성장통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았다. 덕분에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케이팝 청량강경파들마저도 ‘그래서 청량 컨셉트가 뭐냐’는 질문을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밝고,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거야’라는 대답 말고는 좀처럼 시원한 설명을 하기가 어려웠다. 

하나마나 하게 들리는 ‘그냥 밝고,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거’란 말은 그러나, 청량 컨셉트의 핵심이다. 대다수의 청량 케이팝은, 케이팝의 수많은 카테고리 가운데 우리가 상식적으로 인지하는 인기 팝 또는 댄스 팝과 유사한 기반을 공유하고 있다. 멜로디가 선명하고, 리듬이 경쾌하며, 메시지가 직관적이다. 그렇다고 마냥 밝기만 한 건 아니다. 마이너 코드나 한국의 ‘발라드’ 정서를 활용해 아련함과 슬픔을 강조한 콘셉트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 경우 감성은 촉촉하게, 사운드는 산뜻하게 가는 것을 기본으로, 꾸준히 유행하고 있는 신스 팝이나 트로피컬 하우스와 함께 수년째 좋은 파트너 십을 유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케이팝의 청량 컨셉트는 맑고 서늘하고 깨끗하고 선량한, 청량이라는 단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를 소리와 이미지로 다양하게 펴 바른 확장 증보판이다. 추상적인 의미만큼이나 특별한 한계가 없고, 동시에 아이돌팝이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 가운데 하나인 꿈과 희망을 그리는 데에도 더없이 적합하다. 지금부터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다양한 청량의 스펙트럼을 하나씩 짚어보자. 사실 이건 청량이 가진 얼굴의 일부의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청량에는 세월도, 한계도 없다. 

세븐틴, 사진제공=플레디스


하이틴청량: 대다수의 아이돌 그룹은 청량과 함께 더불어 사는 신인 시절을 보냈다.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꿈꾸는 젊음이라는 키워드와 청량 계열의 곡들은 운명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기가 막힌 조합이다. NCT의 청소년 연합팀 NCT DREAM은 하이틴과 깨끗한 청량의 이미지를 곡 단위가 아닌 그룹 자체의 정체성으로 표현해 활동 중인 대표적인 그룹이다. 최근 ‘Cool’로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을 한 위키미키의 초기 ‘틴크러쉬’ 연작도 목표로 한 명확한 목적에 부합하는 곡들이었다. 

아프니까청춘청량: 하이틴청량과 궤를 함께하지만 무게와 방향이 조금 다른 청량이다. 신체의 성장과 함께 더욱 묵직해진 에너지는 십 대를 벗어나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몸소 실천해야 할 의무 아닌 의무를 지니게 된다. 방탄소년단의 ‘I Need U’, ‘RUN’, ‘D.N.A’ 같은, 청량하지만 청춘이 가진 씁쓸한 뒷맛이 남아 있는 곡들이 대표적이다. 


건강청량: 청춘도 언제까지 아파할 수만은 없다. 푹 자고 일어나 말끔해진 기분을 담아 넘치는 생의 에너지로 부르는 건강한 청량도 케이팝을 통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컨셉트다. ‘아낀다’, ‘만세’, ‘아주 NICE’ 같은 세븐틴의 노래들은 이 분야의 모범답안이다. ‘빛나리’나 ‘청개구리’ 같은 곡을 통해 젊음의 좌충우돌 막무가내가 주는 에너지를 재치 있게 담아내는 펜타곤이나 데뷔곡 ‘담다디’에서 최근곡 ‘Pump It Up’까지 스포티한 청량 콘셉트를 다양하게 소화하고 있는 골든차일드 역시 이 계열의 대표적인 그룹이다. 

과격청량: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과격해진 청량. ‘파워청순’으로 큰 사랑을 받았지만 사실 그룹 여자친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이 단어가 아니었나 싶다. 쨍하도록 선명한 비트와 멜로디에 맞춰 몸을 내던지는 이들의 무대는 청순이 품기에는 너무나 큰 그릇이었다. 청량의 대명사로 불리는 샤이니의 경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청량을 소화한 그룹이었지만 ‘과격청량’ 분야의 한 획을 그은 그룹으로 기억해도 좋다. ‘Sherlock•셜록 (Clue+ Note)’, ‘Ring Ding Dong’, ‘Lucifer’ 같은 곡들을 청량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는 지금까지 어떤 그룹도 도달하지 못한 일종의 경지였다. 

아련청량: 청량하다고 마냥 밝지 않다는 건 이 분야를 깊게 파 보면 알 수 있다. 소녀시대의 데뷔곡이자 케이팝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 ‘다시 만난 세계’에서 러블리즈의 노래들까지, 아련 한 스푼을 더하는 순간 청량은 더욱 매력적인 컨셉트로 변한다. 마이너 코드의 정석이라 불리는 윤상을 필두로 스페이스 카우보이, 다빈크, 황현 같은 작곡가들의 곡을 찾아 들으면 바로 이해가 가능한 부문이다.

복고청량: 인피니트, 카라, 나인뮤지스, 보이프렌드의 히트곡, 또는 숨어 듣는 명곡들과 함께 2010년대를 전후한 케이팝을 사로잡았던 스윗튠의 노래가 이 분야의 정석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소위 ‘K뽕’이 들어간 멜로디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빡빡한 신시사이저 음의 조화는 이후 레트로 무드를 살린 청량한 댄스팝의 기준이 되었다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CREDIT 글 |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