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는 위기의 대한민국을 위로할 팔자인가

예능판서 물 만난 골프여제, 예능王이 될 상인가

2020.09.14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티캐스트 E채널 '노는 언니'



골프에 ‘골’자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는 TV 스포츠 뉴스 화면에서나 보던 인물이다.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도 가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건 알았지만 챙겨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인 ‘골프여제’란 사실쯤은 인지하고 있던 터다. ‘골알못’(골프를 알지 못하는) 내가 느끼기에도 각종 매체를 통해 그의 이력과 활약상이 자주 다뤄졌고, 주변 골프 마니아들 사이에선 잊을 만하면 그의 이름이 언급되곤 했으니까. 2020년 현재, 가장 뜨거운 예능인 ‘박세리’ 얘기다.

 

전(前) 국가대표 골프선수 박세리가 예능을 한다. 그것도 대충 띄엄띄엄도 아니고 어지간한 개그맨들보다도 ‘열심히’ 하고 있다. 고정 출연 중인 E채널 ‘노는 언니’를 비롯해 최근 방송을 시작한 SBS ‘정글의 법칙 in 와일드 코리아’, MBC ‘나 혼자 산다’ 등에 ‘반 고정’ 멤버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뿐인가, 8월부터는 ‘하지 않으면 요즘 대세가 아니라는’ 유튜브 콘텐츠도 정기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덕분에 ‘박세리’를 다시 본다. 아니, 제대로 보게 됐다. 골프를 몰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이름 석 자와 맨발 투혼 경기 장면쯤은 다들 안다. 그만큼 본업의 화려한 성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무게 있는 인지도를 확보했다는 얘기다. 때문에 상당히 친숙한 느낌도 드는데, 그래서 은근히 더 알고 싶어지는 묘한 자극도 준다. ‘골알못’ 입장에서 현역 박세리의 세계적인 실력은 여전히 잘 모르겠는 범주이지만, 적어도 오늘날 잘 알게 된 것은 있다. 박세리가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이며, 부지런한 예능인인가 하는 사실.

 

무엇보다도 ‘박세리’로 인해 탄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그의 첫 고정 예능 ‘노는 언니’에서의 활약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노는 언니’는 박세리를 맏언니로 삼아 남현희(펜싱) 한유미(배구) 곽민정(피겨스케이팅) 정유인(수영) 김은혜(농구) 등 전 현직 국가대표 여성 운동선수들의 일탈을 담는 리얼 버라이어티다.


사진출처='나 혼자 산다' 방송캡처


강호동 허재 안정환 서장훈 등등 운동선수 출신이 예능에 뿌리내린 사례는 제법 많았는데, 그러고 보면 ‘노는 언니’의 출현 전까지 ‘왜 여성 운동선수 출신 예능인은 없지?’란 의문 자체를 가진 적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새삼 놀랐다. 물론 박세리를 포함해 김연아 김연경 이상화 등 여성 운동선수들이 현역 은퇴 전후로 예능의 문을 두드린 경우는 적지 않았지만 지분이 크거나 오래 가는 경우는 사실상 없었다. 이들의 예능 활약은 하나의 이벤트로써 반짝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데 그치는, 일종의 ‘일탈’에 가까웠던 것이다.


박세리가 전면에 나선 ‘노는 언니’가 특별한 이유는 이것이 여성 운동선수들로‘만’ 꾸린 최초의 예능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만큼 허를 찌르는 발상의 전환, 신박한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상당히 의미 있는 콘텐츠라는 점에서 ‘노는 언니’는 일단 발대식만으로도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박세리는 이 프로그램의 탄생에 뿌리로 자리했고, 현재 한 달 넘게 방송된 가운데 프로그램 존재의 이유라는 사실을 매회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다.

 

팀 내 ‘맏언니’인 박세리는 일단 동생들을 아우르고 도닥이며 멤버들 사이 무게중심을 잡는다. 또 ‘운동만 하느라 놀 줄 모른다’는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의 ‘일탈’이라는 프로그램 컨셉트를 확립하고 기획의도를 충실히 구현해내는 메인 출연자다.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낼 뿐 아니라, 예능적 재미가 발현되는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는 감각적인 플레이어다. 기본적으로 소박한 것에서도 웃음을 만들어내거나 때때로 적당한 갈등도 입힐 줄 아는 컨트롤이 볼수록 놀랍다.

 

‘노는 언니’ 속 박세리는 여성 스포테이너들의 예능 저변 확대라는 사명감마저 지닌 듯 보인다. 시대가 주어준 운명이든, 스스로 자처한 제2의 인생이든 박세리는 예능이라는 새로운 경기장에서 쉼 없이 달리고 구르는 중이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할 일인 양, 골프 여제의 타이틀과는 상관없이 낯선 그라운드에서 춤을 추고 드러눕는 최선의 역량을 다하고 있다.


사진제공=티캐스트 E채널 '노는 언니'


 

이 행보가 어쩐지 긴 시간 뭉근할 것이라는 신뢰가 드는 까닭은 사명감 한편에 일종의 ‘보상심리’마저 엿보이기 때문이다. ‘노는 언니’와 유튜브 콘텐츠 등에서 박세리는 운동하던 시절 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들에 목말라하는 모습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이전엔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재미들을 깨닫게 되는데 스스로 진심인 기색이 역력하다. ‘과거의 영광 속에 누리지 못했던 세리의 진짜 인생을 되찾고야 말겠다!’는 절절한 외침.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따라갈 수 없다 했던가. 박세리가 이처럼 한껏 예능을 즐기는 한, 앞으로 여성 스포테이너들의 입지도 오래오래 단단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지. IMF 외환위기 시절, 1998년 US여자오픈 연장 18번 홀에서 물에 빠진 공을 살리겠다며 툭툭 양말을 벗고 들어가 샷을 날린 박세리가 얼마나 큰 감격을 안겼는지. 당시 실의에 빠진 대한민국에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한 박세리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예기치 않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반년이 흘렀다. 지금 박세리는 마치 맨발 투혼 그때처럼 이제는 골프 아닌 예능 활약으로, 코로나 블루에 허덕이는 대한민국에 또 다시 위로를 건네고 있다. 


윤가이(칼럼니스트, 마이컴퍼니 본부장) 





CREDIT 글 | 윤가이(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