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도 전진 못한 일일극, 임성한 김순옥 후예는?

2020.08.24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MBC, KBS


15년 전 집에서 독립했다. 독립과 함께 달라진 것 중 하나가 채널 선택권이다. 지금이야 ‘보고 싶은 걸 선택’해서 휴대폰 등으로 볼 수 있는 시대지만 당시에는 TV가 절대지존이었다. 절대 권력을 쥔 TV를 두고 우리 가족은 저녁때마다 채널 쟁탈전을 벌였다. 엄마가 승리하는 날엔 집안엔 어김없이 일일드라마가 상영됐다. 이 지난한 싸움은 나의 독립과 함께 종식됐다. 나는 그렇게 일일드라마와 자연스럽게 작별했다. 고향에 내려갈 때 빼고는.

 

엄마는 여전히 TV 중심의 수동형 콘텐츠 소비자다. OTT라는 신세계가 발견됐고, 유튜브 세계가 활짝 열렸지만, 엄마의 TV를 향한 지조는 꺾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엄마가 ‘기계치’인 것도 한몫한다. (그렇지…엄마?) 요즘 엄마의 채널 리스트엔 오후 7시 20분에 방영되는 MBC 일일드라마 ‘찬란한 내 인생’과 8시 30분에 찾아오는 KBS1 ‘기막힌 유산’이 있다. 그사이에 방영되는 KBS1 ‘위험한 약속’까지 보는 날엔, 일일드라마 3단 콤보 시청이 완성된다.


얼마 전 고향에 내려가 엄마가 틀어 놓은 ‘찬란한 내 인생’을 보다가 무심코 말했다. “설마, 심이영(박복희 역)이 회장님댁 잃어버린 딸은 아니겠지?” “맞는데?” “……!” ‘찬란한 인생’이 끝나고 ‘기막힌 유산’으로 채널을 돌려 보는데, 박인환(부영배 역)이 팔순 잔치 자리에서 강세정(공계옥 역)을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나왔다. 또 무심코 던졌다. “너희들 엄마 될 사람이다.” 얼마 후 박인환이 말했다. “다들 인사들 해라. 니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사람, 니들 새어머니다!” 드라마 중간에 투입돼도 이야기를 척척 알아맞히는 ‘나는 야, 노스트라다무스’는 당연히 아니고, 일일드라마 소재도 전개도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으니 예측이 어렵지 않다. 게다가 느닷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스토리를 중간 정리해주는 가이드 역할의 캐릭터도 어김없이 등장하니, 줄거리 파악이 이보다 쉬울쏘냐. 등장인물 관계도는 그대로인데 15년간 배우만 바뀌었다.


'찬란한 내 인생' 주인공 심이영, 사진=방송캡처


‘찬란한 내 인생’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보면, 여주인공 박복희의 삶은 이름 그대로 박복하다. 계모에게 구박받으며 자란 복희는 불륜을 저지른 개차반 남편 기차반(원기준)에게 이혼 통보를 받고 거리로 나앉는다. 그러나 우리의 박복희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굳센 캔디형 DNA를 품고 있다. 게다가 우연히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알고 보니 회장님댁 마나님이다. 이 관계엔 필시 출생의 비밀이 숨어있을 테니, 복희는 머지않아 자기 자리를 찾고 찬란한 인생을 맞을 것이다. 이런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백마 탄 왕자님과 악녀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이 드라마의 악녀를 찾는 데 거짓말하지 않고 5초도 걸리지 않았다. 회장님댁 딸로 고상하게 자란 고상아(진예솔), 역시 이름에서부터 캐릭터를 알리는 그녀는, 기존 일일드라마가 그랬듯이 외모와 말투에서부터 ‘악녀’라고 우렁차게 외치고 있다. 옷은 명품이고, 자세는 도도하며, 목소리는 앙칼지고, 눈에선 이유 불문 광선이 뿜어나온다. 그러나 박복희와 ‘뒤바꾼 운명’인 게 이 드라마의 기본 설정이니, 그녀가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질투의 화신이 된다’에 내 재산 1000원을 건다.


‘기막힌 유산’에서도 익숙한 패턴은 무더기로 발견됐다. 드라마가 끝날라치면 인물들이 놀란 듯 눈을 똥그랗게 뜬다든지, 열린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비밀 대화를 엿듣는다든지, 중요한 서류를 간발의 차로 빼돌린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혹시나 해서 지난 영상 클립을 찾아보니, ‘김치싸대기’를 잇는 ‘자장면싸대기’도 이미 방영됐다. 이러한 단순한 패턴은 그동안 ‘주부 시청자를 위한 배려’라는 이름으로 성의 없이 반복돼 왔다. “주부들이 설거지하면서도 드라마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일일드라마 제작진의 사명감 중 하나라는데, 실제로 엄마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에도 반찬 만들랴, 멸치 똥 따랴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며 귀로 본다. 이쯤이면 드는 의심. 일일드라마가 습관에 기대고 있어서 주부들이 멀티플레이어가 된 것일까, 주부들이 바쁘기에 일일드라마가 단순해진 것일까. 무엇이 닭이고 무엇이 달걀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확실한 건 일일드라마 화제성이 이전만 못하다는 점이다. 시청률이 안 나오고 광고도 붙지 않자 SBS는 저녁 일일드라마를 2017년에 과감하게 정리했다. MBC는 1년간 폐지했다가 ‘찬란한 내 인생’을 통해 부활시킨 경우인데, 5-6%의 시청률로 고전 중이다. KBS1이 20% 대의 시청률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 상황이 이러다 보니 방송가에선 임성한-김순옥 작가 등이 활약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는데, 일일드라마가 저녁 메인 뉴스로의 시청자 유입을 책임졌던 그때 그 시절에 비하면 기세가 참 많이 꺾이긴 했다. 방송 매체 다변화 때문에? 맞다. 시청자 패턴 변화로 인해? 그것도 맞다. 그런데, 변할 줄 모르는 방송사의 안일함에는 문제가 없나.


'기막한 유산' 주인공 강세정, 사진제공=방송캡처


돌이켜보면, 일일드라마-막장드라마 대가로 군림한 임성한은 클리셰를 과감하게 부순 작가이긴 했다. 그녀의 드라마는 시청자의 예측을 허용하지 않았다. 늘 의외성이 넘쳤다. 유체이탈, 돌연사, 접신, 눈에서 레이저 쏘기, 복근에서 빨래하기 등등. “암도 생명체인데 같이 살아야죠”(‘오로라 공주’) 라는 대사를 쓸 수 있는 작가가 세상 어디 흔한가. 기발함을 넘어선 기괴하고도 엽기적인 ‘임성한 월드’가 중계되던 시절, ‘욕하면서도 본다’라는 말이 제 옷을 입었다.

 

그런 임성한이 2015년 ‘압구정 백야’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고(최근 컴백 소식이 들려온다), LTE 급 전개와 복수와 장서희의 눈 밑 점 하나로 임성한과 일일드라마 양대 산맥을 형성했던 김순옥 작가마저 주말드라마와 미니시리즈로 떠나면서 자기 취향과 개성을 독야청청 드러내는 작가가 드물어진 건 사실이다. 임성한-김순옥의 빈 자리는 노리는 작가들이 등판하긴 했지만, 창의성과 패기는 빠지고 막장 공식과 클리셰와 독기만 남은 느낌이랄까.

 

엄마에게 일일드라마의 성의 없음과 막장 전개에 대해 투덜거린 후 뉴스로 채널을 돌렸다. 뉴스에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단 사람들이 개그맨 뺨치는 발언을 하고 있고, 복수와 살인과 혐오가 난무한다. “어이쿠, 현실이 더 막장이네. 우울해진다.” 엄마의 이 말에는 반박 불가. 괜히 무안해져 채널을 돌렸다. 현실도 일일드라마도 일보 전진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정시우(칼럼니스트)





CREDIT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