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벨에포크’, 당신의 리즈 시절은? 지금 이 순간!

2020.05.21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제공=이수C&E


영화 ‘은교’의 주인공 이적요 시인은 극 중에서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받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무릎을 치며 수긍했던 말이지만, 나이 먹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에 가슴 한켠이 뻐근해지는 대사였다. 하지만 ‘늙음’과 ‘노인’의 기준이 점차 바뀌는 요즘이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100세 인생을 바라보는 시대가 됐다. 이제 환갑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넘어 청춘의 시작이라 말한다.

무서운 건 시대 변화의 속도다. 눈 깜짝할 새라는 세월의 흐름보다도 더 빠르게 변해 발맞추기 버겁다. 버글스가 ‘Video kill the radio star'를 노래했던 것이 1979년인데, 40년 사이에 TV와 컴퓨터를 넘어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했다. 느림의 미학을 알고, 아날로그의 감성을 사랑하며, 손가락으로 하는 대화보다는 직접 눈과 입, 표정으로 전하는 의미가 소중한 세대에겐 그저 낯선 세상이다. 분명 편해 보이는데, 직접 해보려 하면 배우기도 어렵고, 타인의 눈치가 보인다. 

하여 괜히 소외된다. 분명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 그릇된 것이 아닌데, 세상은 다름을 존중하기보다는 적응과 배움을 강요한다. 어린 세대는 그들을 가리켜 ‘아재’ 혹은 ‘꼰대’라 지칭하며 멀리하고, 그럴수록 나이 든 세대들은 “나 때는 말이야”를 이야기한다. 소통하기가 더 편해진 시대인데, 오히려 대화를 시도하기 쉽지 않다. 그렇게 이 시대의 노년들은 새로운 문화에서 조금씩 멀어지며 사회의 주축에서 한 발짝 떨어짐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있다.

영화 ‘카페 벨에포크’(감독 니콜라스 베도스)의 빅토르(다니엘 오떼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때 유명했던 만화가였지만, 이제 사람들은 만화책을 굳이 사 보지 않는다. 그나마 신문 한 쪽을 장식하던 삽화도 사라졌다. 하지만 빅토르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이 적응하기보다는, 바뀐 세상을 탓하고 만다. 꼰대라 불려도 괜찮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또 다시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그냥 지금껏 살아온 대로 노년을 보내는 게 오히려 편하다.

하지만 아내 마리안(화니 아르당)은 다르다. 새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발전에 노력하며, 사업가 기질을 마음껏 발휘한다. 하여 과거에 머물며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빅토르가 영 못마땅하다. 결국 남편의 친구와 바람이 나고, 빅토르를 집에서 내쫓아 버린다. 하루아침에 머물 곳이 없어진 빅토르, 그런 그에게 한 장의 초청장이 도착한다. 아들의 친구이자 과거 자신이 책 한 권을 선물했던 앙투안(기욤 까네)이 설계한 100% 핸드메이드 시간여행으로의 초대였다.

사진제공=이수C&E


빅토르는 앙투안의 이벤트 연출에 따라 과거 첫사랑을 처음 만났던 ‘카페 벨에포크’로 회귀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가상으로 만든 세트이고,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들은 그저 배우일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고이 간직했던 기억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옛 시절 청춘의 열정이 다시 일렁인다. 나아가 자신 앞에 나타난 첫사랑의 대역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내면에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고, 결국 커다란 불꽃을 일으키며 빅토르의 삶을 다시 한번 뜨겁게 지핀다. 

‘카페 벨에포크’는 고령화 시대를 관통하는 자칫 무거울 수도 있을 소재에 로맨스 영화라는 낭만 가득한 옷을 입혔다. 프랑스 특유의 재기발랄한 위트와 힐링을 가득 담아 기분 좋은 사랑 이야기로 두 시간으로 장식했다. 특히 ‘제8요일’로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다니엘 오띠뉴의 호연이 반짝반짝 빛난다.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가 나이 든 아내와 함께 하며 옛 추억에 스며들 때도, 어린 여배우와 함께 하며 설렐 때도 빅토르의 로맨스에 깊이와 품격을 더한다.

‘벨에포크’는 프랑스어로 ‘과거의 좋았던 그때’를 말한다. 요즘 말로 ‘리즈 시절’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예전이 정말 좋았지”라며 노스탤지어를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닻을 내리고 시대에 적응하는 빅토르의 모습에 힘을 싣는다. 달콤했던 춘몽에서 깨어난 빅토르는 은퇴 후 시들어가던 인생에 끝을 고한다. 과거에 연연하기보단 앞으로의 인생으로 시선을 돌리고,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서는 모습으로 희망을 전한다.

단, 그의 변신은 과거와의 단절을 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나온 시절 위에 새로운 결심을 얹는다는데 의미가 있다. 마리안이 첫 만남에서 떨어뜨리고 갔던 머플러는 강렬한 레드였지만, 나이를 먹은 마리안이 떨어뜨리는 머플러는 부드러운 브라운 컬러다. 사랑, 나아가 인생이 언제나 새빨갛게 강렬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흘러 처음보다 색이 조금 바랬더라도 또 다른 아름다움이 우리의 인생을 빛내고 있을 것이다. 카페 벨에포그를 꼭 과거에서만 찾지 말기를. 당신의 리즈 시절은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

권구현(칼럼니스트) 


CREDIT 글 | 권구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