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물의 탈을 쓴 환경극 '렁스'

연극열전 여덟번째 시리즈 첫 작품

2020.05.21 페이스북 트위터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성을 갖춘 우수 작품을 소개해온 연극열전 여덟 번째 시리즈의 첫 작품은 '렁스'다. 지구 환경에 대해 박사 논문을 쓰고 있는 여자(이진희, 곽선영)와, 음악을 하는 남자(김동완, 이동하, 성두섭)는 동거 중이다. 이케아에서 물건을 사다가 남자는 여자에게 아이를 갖자고 말했다. 여자는 아이 한 명이 만들어내는 탄소 발자국이 자그마치 1톤에 가깝고 70억 명 인구에 한 명을 더 하는 것은 재앙이라며 흥분한다. 기다랗고 하얀 단상이 전부인 무대에서 이렇게 연극 '렁스'는 시작한다.

 

‘렁스(lungs): 폐, 숨쉬다’가 제목이고 ‘인류에 한 명의 아이를 보태도 될 것인가’를 첫 논쟁거리로 삼는 만큼 환경연극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관람한 작품은 연애물에 가깝다. 솔직하고 충동적인 연구자인 여자와 배려 많고 감성적인 예술가 남자. 서로 다른 직업과 성격의 연인이 임신과 유산 그리고 이별과 재결합 등을 거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다툼과 갈등이 작품의 내용이다. 여자와 남자는 90여 분 공연 시간 내내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한다. 임신을 확인하기까지의 초조함, 임신을 알고 난 이후 남자의 반응에 대한 기대와 실망, 그리고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이 커플이 막상 임신을 하자 누구 부모에게 먼저 알릴 것인지를 두고 은근히 신경전까지 작품은 연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갈등을 담아낸다. 이들은 임신과 유산 그리고 이별 등 연인들이 구체저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썰전' 연인 편을 보는 것 같다. 이들의 대화는 논점에서 종종 벗어나고 모순된 감정이 순간순간 드러나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연극 '렁스'는 각기 개성이 분명한 연인이 만나면서 겪게 되는 갈등과 혼란의 기록이다. 남자와 여자는 매 상황마다 적극적으로 질문한다. 환경을 생각하며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를 고민하는 이들의 사적인 애정 싸움은 애정물에 머물지 않고 사회물로 확장된다. 작품에서 일관되고 중요하게 유지되는 질문이 좋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환경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공정 무역 제품을 사용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정말 더 좋은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상처를 견디지 못한 여자는 똑같이 상처 입은 남자를 힘들게 하고, 그런 상황의 남자는 다른 여자에게 위안을 받기도 한다. 이들은 평범한 연인들처럼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못됐다. 단지 이들이 다른 점이라면 그런 감정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쟁이 때론 혼란스럽고 모호하고 모순적이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질문하는 이유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복잡한 관계가 진행되면서 환경이 점점 악화되고 있음을 예상할 수 있는 대화가 나온다. 인류는 지구를 오염시키고 점점 더 인간이 살아가기 힘든 환경으로 변한다. 작품은 다시 연극의 시작점에 놓았던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옳은 일인가.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인류의 폐를 끼친다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부정적인 상황에도 연극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질문과 노력이 인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란 조심스러운 희망을 내어 놓는다. '렁스'는 임신과 유산, 출산과 재결합 결혼을 거쳐 사별하는 관계까지 암전이나 휴지 없이 각 장면들을 이어붙여 편집한 듯 진행된다. 그리고 매순간 진지하게 질문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려는 듯 신발을 놓아둔다. 연극이 끝나고 남은 기다란 단상 위에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들의 발걸음이 파멸이 아닌 희망의 발걸음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며 극이 마무리된다. 7월5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박병성(공연 평론가) 

 



CREDIT 글 | 박병성(공연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