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빈을 보는 시선 ㅣ ① 이 후라이 같은 남자야!

2020.02.18 페이스북 트위터

사진=tvN


확실히 힘이 조금 빠지는 결말이다. 극 중반까지 쌓아 올린 긴장감이 허술하게 무너져 내렸고, 꼬여 있는 갈등들도 허망하다 싶을 정도로 쉽게 풀려버렸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녀가 1년에 2주, 스위스라는 오작교를 통해 만난다는 열린 결말은 해피엔딩이라 하기에도 새드앤딩이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분단국가라는 현실 안에서 모색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작가는 믿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너무나 빤해서 김이 살짝 새는 쪽이다. 게다가 ‘장거리 연애’라는 결말은 '별에서 온 그대'에서 박지은 작가가 한차례 써먹은 방법 아닌가. 그럼에도 '사랑의 불시착'은 한 가지 미덕만큼은 확실하게 보여준다. 멜로는 주인공 하기 나름이라는 진리를. 손예진의 매력도 눈부셨지만,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현빈이다. 

 

현빈이 발군의 기량을 발휘하는 주 종목은 멜로다. 이 분야에서 그는 어떤 배우가 평생 한 번 경험하기도 힘든 절정의 순간을 이미 두 번이나 경험했다. 잠자는 누님들의 연애 세포를 깨웠던 '내 이름은 김삼순' 때 그랬고, “저한텐 이 사람이 전지현이고 김태희입니다”라는 외침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김태희고 전지현이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저격한 '시크릿 가든' 때도 그랬다. 그리고 현빈은 16일 끝난  tvN 금토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으로 또 한 번 시청자가 ‘현빈 월드’에 착륙하도록 유인했다.

 

이것이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대단하다. 아름다움과 묘령의 매력으로 불특정 다수의 마음을 낚아채는 유혹의 기술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므로. 이건 연기로 일가를 이룬 송강호나 최민식도 경험하지 못한 영역의 일이다. 누가 누가 더 뛰어나냐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배우마다 재능을 드러내는 분야가 있음을 말하고 싶음이고, 멜로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스타가 자리하는 속성을 이야기하려는 거다. 당대 대중의 욕망과 백일몽을 담은 좌표가 된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현빈을 ‘멜로킹’이라 수식하게 하는 건, 단순히 멜로 드라마에서 세 번의 강력한 전환점을 마련해서가 아니다. 그건 그가 멜로라는 장르 안에서 보여준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기인한다. '아일랜드'의 보디가드 강국으로 멜로 드라마에 본격 등장했을 때 현빈은 인정옥 작가가 창조한 감각적인 대사들을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담백하게 내뱉으며 신인답지 않은 긴 여운을 남겼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됐다고 고백하는 아내(이나영)에게 화는커녕 “나보다 똑똑한가 봐. 그 놈.. 난 좀 부족한가 봐”라는 말로 고통을 꾹꾹 삼키며 변하지 않는 순정을 내비쳤던 바보 강국은 이후 현빈 연기에서 자주 포착되는 면모 중 하나다.


사진제공=tvN

 

연이어 등장한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백마 탄 왕자의 면모를 드러내더니, 노희경 작가가 구축한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현실 세계로 착지해 ‘종종 멋있지만 자주 구질구질’한 우리네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드라마 밖에 정말 정지오(현빈)가 살아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안겼다. 감정을 내지를 기회가 있으면 눈물부터 찾는 또래 연기자들 사이에서 현빈의 힘을 툭 뺀 연기는 자못 신선한 재능으로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처럼 일상적인 연기를 필요로하는 작품 안에서 그 진가가 더욱 빛났다. 바람둥이 연기를 할 때에도 그는 달뜨지 않았다. 1966년도에 만들어진 이만희 감독의 '만추'를 리메이크 한 동명 영화에선 ‘연민이 많고 속이 깊고 쓸쓸함이 느껴지는데 귀엽기까지 한’ 바람둥이 남자 훈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며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 그러니까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는 백마 탄 왕자님과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가장 보통의 남자. 현빈처럼 멜로라는 같은 뿌리 안에서 양극단의 매력을 능숙하게 조율하며 오가는 배우는 드물다.


그래서다. 북한 장교와 남한 재벌 여성의 ‘판타지적인 사랑’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감하고도 ‘현실적인 상황’에 던져서 끌고 가는 '사랑의 불시착'이 현빈에 최적화된 드라마로 보였던 건. '사랑의 불시착'은 외계인과 톱배우의 사랑을 그린 '별에서 온 그대'와 인어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은 '푸른 바다의 전설'로 판타지 세계에 애정을 드러내 온 박지은 작가의 작품이다. '사랑의 불시착'에도 판타지는 개입해 있다.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휴전선이 그것.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 북한은 물리적으로는 쉽게 닿을 곳이지만, 심리적으로는 대한민국 반대편에 위치한 아르헨티나보다도 멀게 느껴지는 미지의 땅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또, '별에서 온 그대'나 '푸른 바다의 전설'처럼 판타지 세계로 완전히 편입할 수도 없다. 무한 상상력이 허용되는 공간과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판타지의 종류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사랑의 불시착'에 필요했을 미션. 판타지를 동력으로 삼되 현실감도 확보해야 하는 일. 이는 두 가지 상황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능력을 지닌 현빈에게 더 없이 알맞다.

 

어떻게 보면 '사랑의 불시착'의 리정혁은 현빈이 이제껏 보여 온 결들의 집합체다. 애정을 퉁명스러움에 감춰 표현할 때의 리정혁은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식이었다가, 밀당 따위 모르고 순정으로 내달리거나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몸을 던질 땐 '아일랜드>의 강국이었다가, 출신 성분으로 권력을 적절히 활용할 땐 '시크릿 가든'의 재벌 2세 김주원의 비즈니스적 면모를 보이다가, 연인과의 소소한 하루를 꿈꿀 땐 '그들이 사는 세상'의 지오가 됐다. 로맨틱하지만 오글거리진 않고, 우직하지만 촌스럽진 않으며, 담담하지만 깊은 진심을 내보일 줄 아는 남자. 남자가 여자가 보호한다는 이 드라마의 전형적인 틀이 그리 낡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현빈이 부여한 섬세한 감성의 결 덕분이다. 어메이징을 넘어선 거짓말 같은 남자랄까.

 

멜로 장르에서 특출한 기록들을 새겨 온 이 배우는 멜로 안에만 머물러 있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최근 몇 년간 스크린에서 보여주고 있는 행보가 이를 읽을 수 있는 힌트들로, 현빈의 선택은 액션-범죄-사극을 가리지 않고 그 폭을 묵묵히 확장해 가는 중이다. 아직 멜로 이외의 장르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뽐낸 작품이 없다는 것은 풀어나가야 할 숙제지만, 미남 배우로서만 소비되지 않겠다는 결기와 비전은 충분해 보인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래서 궁금하다. 이 후라이(거짓말) 같은 남자가 앞으로 보여줄 행보가.

정시우(칼럼니스트, 영화 저널리스트)




CREDIT 글 | 정시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