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걸 그룹│① 다시, 소녀들의 시대

2016.05.10 페이스북 트위터


“트와이스 뮤뱅(뮤직뱅크) 첫방이래. 얼른 뛰어가렴.” 얼마 전, 소녀시대의 수영이 인스타그램에 팬들의 사진을 올리며 쓴 이 말은 요즘 걸 그룹 시장의 판도를 보여준다. 트와이스의 ‘Cheer Up’은 공개된 지 2주가 지나도록 음원차트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고, 앨범 [PAGE TWO]는 4월 25일부터 5월 1일까지 약 41,000장이 팔리며 소녀시대와 f(x)의 뒤를 이어 역대 여성가수 초동 판매량 8위를 기록했다. 한편 서바이벌 오디션 Mnet [프로듀스 101] 출신의 I.O.I는 데뷔하자마자 하늘보리와 이슬톡톡·SK텔레콤·에뛰드하우스·모바일 슈팅게임 [백발백중] 등 온갖 분야의 CF를 독식하다시피 하는 중이다. 시청자 투표로 뽑힌 멤버들인 만큼 팬덤이나 개별 인지도는 말할 것도 없다. 소녀시대가 데뷔한 지 10년 만에, 팬덤과 대중적 인지도를 동시에 거머쥔 새로운 걸 그룹이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카라는 모두 2007년에 데뷔했다. 당시 이들이 S.E.S나 핑클을 보고 자란 세대에게 사랑받았다면, 지금 트와이스나 I.O.I 같은 팀들은 바로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를 보고 자란 이들에게 사랑받는다. “각종 커뮤니티에 소녀시대에 관한 예전 자료들이 올라오는 걸 보고” 여자친구를 기획했다는 쏘스뮤직 소성진 대표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현재 걸 그룹의 주요 소비층은 본격적으로 팬덤 활동을 했든 안 했든 소녀시대나 원더걸스를 통해 ‘어리고 예쁜 소녀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습’의 힘을 이미 경험해본 세대다. 소녀시대 데뷔 당시 30~40대 남성팬들을 가리켜 ‘삼촌팬’이라는 명칭이 생겼던 것처럼, [프로듀스 101] 방영 중에는 효과적인 투표 방법을 몰라 고군분투하는 ‘아재팬’들의 이야기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소녀의 아름다움이란 사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외면하기 어려운 매력이며, 때문에 활기로 북적이는 요즘 걸 그룹의 세계는 20대 중반 이상 구매력 있는 여성팬과 남성팬 모두에게 10년 만에 찾아온 익숙한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최근 1~2년 사이 데뷔한 걸 그룹의 대부분이 ‘소녀’라는 키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경향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씩씩한 소녀 이미지의 여자친구, 순정만화 주인공 같으면서도 강단 있는 느낌의 러블리즈, 각자 다른 예쁨으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트와이스는 물론 ‘꿈꾸는 소녀’의 서사를 입은 I.O.I까지 신인 걸 그룹들은 소녀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다양한 이미지를 차용한다. 심지어 여자친구의 데뷔곡 ‘유리구슬’의 구성이나 정서·발차기 안무와 아홉 명이라는 트와이스의 멤버 수, ‘다시 만난 세계’의 뮤직비디오처럼 멤버들 각자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은 I.O.I의 ‘Dream Girls’ 뮤직비디오 등 소녀시대를 레퍼런스 삼은 것 같은 요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러한 팀들은, 가장 성공한 걸 그룹인 소녀시대의 유산에서 핵심만 빌려오고 있는 것이다. 실질적인 1세대 걸 그룹 중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팀은 밝고 건강하며 꿈꾸는 이미지에서 천천히 성장해온 소녀시대뿐이고, 결국 이들이 증명한 것은 소녀 이미지의 원형이 갖는 강력한 힘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K-POP 시장의 상황과 맞물리며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트와이스에 대만 출신의 쯔위, 일본 출신의 사나·미나·모모가 있듯, 적어도 아시아권에서 예쁘고 재능 있는 어린 소녀들은 대부분 한국의 걸 그룹에 몰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 배우를 꿈꾼다 해도 미쓰에이의 수지나 AOA 설현의 경우처럼 일단 걸 그룹으로 데뷔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프로듀스 101]의 김소혜 역시 원래는 배우 지망생이었고, 운이 좋다면 I.O.I 활동 후에는 원하던 바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더불어 걸 그룹 시장은 점점 ‘소녀’를 콘셉트화하는 것에서 벗어나 아예 리얼리티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소녀시대는 ‘다시 만난 세계’의 뮤직비디오와 가사·발차기 안무를 통해 꿈꾸는 건강한 소녀들의 이미지를 전달했지만, I.O.I는 그것을 데뷔곡 ‘Dream Girls’가 아니라 데뷔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기도 하는 [프로듀스 101]의 방송 과정에서 구축해버렸다. ‘Dream Girls’의 뮤직비디오와 가사는 이들의 서사를 조금 더 강화할 뿐이다. 걸 그룹은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 소녀의 모습 그 자체를 캐릭터가 아닌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증명해야 하는 데까지 왔다.

지난달 29일,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는 일본 게임이자 애니메이션 [아이돌 마스터]의 한국 드라마화를 위한 오디션을 시작했다. 롯데쇼핑은 내년 초 롯데엔터테인먼트(가칭) 법인을 설립하고 연예기획사업에 진출해 걸 그룹을 만들겠다([더벨])고 밝혔다. [프로듀스 101]에서 탈락한 몇십 명의 소녀들은 각자의 회사에서 데뷔를 준비 중이며, I.O.I 멤버들 역시 10개월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이 끝나면 따로따로 새로운 팀으로 데뷔할 예정이다. 이 와중에 뮤직웍스 소속 김소희처럼 또 하나의 서바이벌 리얼리티가 될 [아이돌 마스터] 오디션에 참가한 연습생도 있다. 유례없이 많은 소녀의 데뷔가 예정되어 있고, 그중 대부분은 리얼리티를 통해 출발선에 섰다. 여기서 얻은 서사와 캐릭터를 데뷔 후까지 어떻게 이어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소녀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사이, 걸 그룹 세계의 다음 챕터는 이미 펼쳐졌다. 아마도 모두에게 파티보다는 전쟁에 가까울.

CREDIT 글 | 황효진
디자인 | 정명희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