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음악시상식이란 무엇일까

2019.12.20 페이스북 트위터


시상식이 갖춰야 할 미덕은 무엇일까? 아니, 애초에 시상식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음악계도 시상식 시즌을 보내는 중이고, 올해도 어김없이 같은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선정위원으로서 직접 심사에 참여하거나 음악 팬으로서 관망하면서 느낀 바는 여전히 한국의 여러 대중음악 시상식엔 아쉬운 지점이 많다는 것이다. 분명히 변화가 필요하지만, 좀처럼 움직임은 크지 않다.

첫 번째 문제는 대표성의 부재다. 일단 시상식이 너무 많다. 전세계 음악시장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미국만 해도(*국제음반산업협회 발표 2018년 기준, 참고로 한국은 6위), 한 해를 대표하는 종합 시상식은 그래미 어워드와 빌보드 뮤직 어워드로 압축된다. 두 개의 시상식은 각각 판이하게 다른 기준과 성향으로 대표성을 얻었다. 이를테면, 전자는 작품성, 후자는 상업성 측면에서의 성과를 대변한다. 또한, 철저히 차트 성적에 기반을 두고 수상하는 빌보드의 리스트가 인기 아티스트로 편중되었다면, 차트 성적이 절대적이지 않은 그래미의 리스트엔 간혹 의외의 아티스트가 등장하기도 한다. ‘2014 그래미 어워드’에서 알앤비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소소하게 반응을 얻었던 맥 와일드(Mack Wilds)의 ‘New York: A Love Story’가 ‘베스트 어반 컨템포러리 앨범(Best Urban Contemporary Album)’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일화는 대표적이다. 참고로 해당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79위가 최고 성적이었으며, 싱글도 장르 부문에서 15위에 오른 것이 다였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깜짝 후보 선정은 그래미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처럼 성향이 다른 소수의 시상식이 결산을 양분하고 주도하는 미국의 구도와 달리 한국대중음악시장에선 온라인 음악 사이트, 언론사, 협회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상식을 연다. 그렇다 보니 대중의 관심은 분산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두 번째 문제, 권위의 부재가 뒤따른다. 권위는 시상식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시상식의 존재 이유라 해도 무방하다. 왜 권위가 그토록 중요한가. 시상식은 보통 한 해동안 발표된 무수히 많은 작품 가운데, 각 장르별로 뛰어난 네다섯 개의 후보작을 고르고, 다시 가장 훌륭한 작품을 가려내어 상을 준다. 이 과정은 엄연히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고 우열을 가리는 작업이다. 선정위원들이 아무리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고자 했다 해도 어쨌든 그 해의 1등을 뽑는 것이다. 혹자는 ‘우열을 가린다.’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표하지만, 어떤 달콤한 말로 설명한다 해도 그게 진실이다. 만약 정말로 이것이 불편하다면, 심사 작업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권위를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시상식이 단지 ‘예술작품 평가놀이, 혹은 줄세우기’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다만, 중요한 건 그 권위는 아티스트가 아닌, 대중을 향한다. 즉, 예술가의 위에서 그들의 작품에 값어치를 매기며,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아티스트를 대신하여 좋은 작품에 대한 보증을 서주는 것이여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작품의 가치를 호소하는 동시에 새로운 스타 탄생의 발판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시상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시청률이나 모객률 따위가 아니라 선정된 작품의 회자여부다. 그러려면 권위가 필요하다. 그래서 권위를 세우고자 노력하지 않는 시상식은 사실상 주최측의 자위행사나 다름없다. 아쉽지만, 한국엔 여전히 권위있는 음악 시상식이 없다.

대부분 메인스트림에서의 상업적인 성과를 핵심 선정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주최측과 규모만 다를 뿐, 비슷한 참여진과 구도로 흘러간다. 물론, 메인스트림에서의 성과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 비단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시장규모 상위권에 속한 다른 나라의 시상식 역시 정도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다. 하지만 비정상적일만큼 아이돌 그룹으로 무게중심이 완전히 기울다시피 한 한국대중음악계의 현황을 고려하면, 유독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매년 점점 화려해지는 무대 이면으로 ‘아이돌 시상식’, 심하게는 ‘아이돌 망년회’와도 같은 그림만 되풀이된다. 당연히 권위를 논하기엔 민망한 상황이다. 절대 다수의 시상식들은 어떻게든 인기 있는 아이돌을 불러모아서 자사홍보와 힘을 과시하는 데에만 관심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반대 지점에서 오로지 음악성만을 선정기준으로 삼는 시상식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비교적 장르를 세분화하고 판매량이란 족쇄를 벗은 덕에 메이저뿐만 아니라 인디까지 폭넓게 껴안는 모습을 보이지만, 선정작만 다를 뿐, 전반적인 진행과 대처 면에서 규모가 큰 메이저 시상식의 하위호환에 머무르거나 아마추어적인 태도가 엿보이곤 한다. 당연히 특정 지지층을 벗어나면,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의 많은 전문가와 마니아를 자처하는 이들은 흡사 조건반사처럼 그래미 어워드를 두고 ‘보수적’이라고 일컫는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2000년대부터의 그래미 어워드는 한국의 그 어떤 시상식보다 진보적이고 트렌디하다. 일례로 그들은 부문을 새로 만들었다가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현재의 대중음악을 껴안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장르 퓨전이 지금처럼 보편화되기 이전에 (크로스오버와는 다른 개념에서) 하이브리드 음악을 선정하는 부문을 만들었던 것은 좋은 예다. 그러므로 보수적이란 평은 어디까지나 미국 대중음악 시장의 상황을 기준으로, 그중에서도 비백인 아티스트와 팬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한국의 음악시상식 중에 선정작업 자체를 제외하고 저들처럼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곳이 있는가. 권위란 일차적으로 그러한 노력 위에서 세워지기 마련이다.

한국에도 권위있는 음악시상식이 탄생하려면, 지금처럼 분산이 아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 보인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각각의 시상식을 만드는 이들이 정체성과 색깔의 차별화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선정기준과 방식에 대한 고민은 물론, 무대연출과 진행 등등, 내외부적인 지점에서 매년 치열하게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지 않는 시상식을 이제는 우리도 하나쯤 가질 때가 됐다.


CREDIT 글 | 강일권(‘리드머’,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