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

2019.11.26 페이스북 트위터


만화가로 데뷔한 이래 출판사에서 원하는 스토리는 늘 고만고만했다.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시대물 속에서 사랑하는 이야기, 아니면 학교를 배경으로 사랑하는 이야기. 요즘은 비엘(BL)이라는 장르가 대세가 됐지만 아무튼 연애물만을 원했다.

그리 잘 팔리는 작가가 아니었던 나는 단행본 출판사나 잡지사에서 늘 학원물 없냐는 주문을 받아야 했다. 그나마 독자에게 어필하려면 수요가 가장 많은 소재로 원고를 그려야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의 TV 드라마가 배경이나 소재는 뭐가 됐던 남녀가 연애하는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처럼, 순정만화도 거의 연애물이어야만 팔린다. 출판사의 굳건한 믿음이라기엔 원래부터 연애물이 제일 인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평범하고 별 사건 없이 안전한 연애물로는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없고 최대한 자극적이고 비틀린 설정이 등장하며 필연적으로 부도덕한 전개도 다채롭게 이어진다.

사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학교 이야기는 좀 다른 소재였다. 학교에서 겪는 일상은 무궁무진한 소재였고 선생님이나 친구들끼리 시시콜콜한 사연들로 그려낼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었다. 출판사에서 원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중 어떤 소재도 팔리지 않을 거라고 미리 차단당했다. 그래도 잡지에 꿋꿋이 실었던 단편들이 몇 작품 있는데 독자 반응은 딱히 나쁘지 않았지만 책 판매량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싶은 소재로 도전한 학원물이 몇 개 있었고 가끔은 출판사가 원하는 방향의 연애를 다룬 이야기도 있었지만 독자 눈높이를 신경 쓰느라 내 마음에 썩 차지 않았다.
다들 그런 만화만 그리는데 나까지 굳이 그려야 하느냐는 불만을 마음 한가득 담은 상태로 무던히 애를 썼지만 거기까지였다.

많은 독자에게 환영받으면서 나도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건 누구나 바라는 이상이겠으나 그런 행운을 누리는 작가들이 모두 좋은 작품만을 내놓았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 비틀리고 상식에 어긋나고 부도덕한 소재와 전개로 일관하는 자극적인 작품들은 작가에게도 부담이다. 이런 작품을 그리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지.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움직이며 작품 속 주인공이 작가와 동일시되면 안된다는 원칙을 지키자면 작가가 더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해야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애초에 그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스토리도 아무나 쓰지 못한다. 작가가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에 무슨 설득력을 독자에게 전하겠나. 잘 팔리는 작품을 쓸 자신이 없으니 인기는 좀 없더라도 잘할 수 있는 작품에 매달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작가는 일상의 작은 조각 하나에 살을 붙여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내서 팔아야 한다. 최대한 눈을 끌게끔 치장하고 가능하면 반칙도 하고 욕을 좀 먹더라도 팔 수 있으면 다 시도해 본다. 팔린다는 확신만 있으면 누군들 로또를 해 보지 않겠는가. 다만 그걸 자기도 좋아하느냐는 질문은 가장 중요하면서 마지막 선택이다. 대부분의 작가는 저기서 포기하거나 이미 그 전에 자신에게는 없는 재능이라는 걸 알기에 포기할 것이다. 말했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팔리는 작품을 내놓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나에게 없는 재주라면 무리해서 따라가려고 기를 써 본들 기운만 빠지고 마음까지 다친다. 당연히 돈도 못 벌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해선 안된다는 금언도 있는데 만화가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으니 이미 시작부터 실패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만화 생태계가 이상적으로 작동될 때 가능한 이야기다. 돈을 적게 벌더라도 먹고 살 만큼만 된다면 하고 싶은 작품이나 그리면서 살면 마음은 편하니까. 하지만 시장은 만만한 곳이 아니며 만화가도 어떤 면에선 보따리 장사 하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팔릴 만한 작품을 내놓고 적당한 보상이 오면 그때 내가 팔고 싶은 것도 끼워 넣는 완급조절이 필요하다. 데뷔작으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만 그 성공에 갇혀서 계속 같은 것만 그리다가 고갈되는 경우도 있다. 출판사가 신인 작가를 제대로 이끌어주지 않고 작가 스스로도 실패가 두려워 다른 시도를 하지 못하다가 금세 주저앉아 버린다. ‘먹고 살 만큼만 조금 벌자’라는 목표는 알고 보면 임파서블 미션에 더 가깝다.

잘 팔리는 소재만 요구하는 것은 시장의 속성이라 그 시장이 크다고 해서 다양성이 풍부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독자들이 찾는 소재들이 한정적이고 그것만 팔리기 때문에 많이 나오는 것이고 주류에서 벗어나면 그만큼 찾는 사람도 그리는 사람도 적을 수밖에 없다. 당신은 왜 좀 더 팔릴 만한 작품을 그리지 않느냐는 질문도, 왜 독자들은 팔리는 작품만 찾고 그 외의 작품은 관심이 없느냐는 질문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다가 또 한편으론 그래도 그리는 작가가 있고 시장은 팔리는 작품으로만 유지되는 게 아니라는 작은 기대에 매달려 본다.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도 기다리는 독자가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도 있어야 뭐라도 쓸 수 있으니까.

CREDIT 글 | 오경아(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