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세대’의 세계

2019.11.18 페이스북 트위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조남주 작가는 중국 베이징에서 ‘82년생 김지영’ 출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 중국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현장에서 보내준 정보에 의하면 준비된 200석이 모두 매진되어 60석을 추가로 마련했지만 그러고도 들어오지 못해 발길을 돌린 독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복도에 서 있었던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토크 이벤트에 참여한 독자들은 총 300명. 행사를 보기 위해 광저우, 상하이 등 다른 도시에서 베이징까지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인데, 이는 올해 초 일본에서 가진 독자와의 만남 때와 다르지 않다. 당시에도 준비된 좌석만으로는 독자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 바깥에 라이브홀을 설치해 무대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지난해 12월에 출간된 일본어판은 1년 만에 제작부수 13만 5000부를, 지난 9월에 출간된 중국어판은 2달 만에 제작 부수 18만 부를 기록했다. 한국의 어떤 소설도 이 소설만큼 열띤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례적일 뿐만 아니라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문학은 오랫동안 세계문학의 소비국이었지 생산국은 아니었다. 한국어라는 소수언어의 태생적 한계와 국경을 넘는 데 필수적인 영어 번역 시스템의 장벽이 가장 큰 이유였을 테지만 ‘타고난 조건’만이 탓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작가는 발견되는 것이지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이 편집자들 사이에는 있다. 작가는 타인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문학의 경우라면 어떨까? 만들어지기도 한다. 폭발적인 작품은 오히려 만들어진 작품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거대한 전환은 예측할 수 없는 반응에서 비롯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도착한 세계문학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종의 사회현상을 동반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현상에는 몇백 만 부가 팔렸다는 식의 숫자만 포함되는 건 아니다. 작품이 사회와 어떤 영향 관계를 맺었는지, 그 작품으로 인해 어떤 세대가 등장했고 어떤 문화가 부흥하거나 쇠퇴했는지, 요컨대 작품 속 이야기가 작품 밖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지 여부도 국경을 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나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 같은 고전을 읽을 때 미국 히피문화와 비트세대와의 영향 관계를 빼놓고 텍스트 자체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의 문학성이 만들어진 문학성이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은 만들어진 문학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조남주 작가와 만나기 위해 행사장을 찾은 중국 독자들은 앱으로 운영되는 한 택시에서의 성폭행 사건 이후 여성들에게 내려진 8시 이후 택시 이용 금지령에 대해 이야기하며 두려움을 공유하는가 하면 해결 방식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비교적 여성의 지위가 높고 맞벌이 부부가 많으며 한 자녀 정책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각하지 않은 중국이라고는 하나 고단하고 불안정한 beipiao(베이징이라는 바다를 떠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신조어)들 사이에서 최근 여성들은 좋은 직업보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요청받고 능력이 있어도 더 쉽게 밀려나는 등 과거에 비해 차별에 노출되는 상황이 많다고 한다. 한편 가부장문화가 뿌리 깊은 일본의 여성들에게는 한국에서 이 책이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 자체가 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 조금씩 다른 이유로 이 책을 필요로 한다. 

개인의 경험이라는 틀 안에 있었기에 사회적 화제가 되지 못한 여성들만의 사소한 차별의 역사는 ‘82년생 김지영’ 이후 더 이상 사소하지 않은 문제로 인식되었다. 사적 경험을 여성의 경험이라는 공적 경험으로 전환함으로써 한 사회의 젠더감수성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른바 ‘김지영 세대’라 불린다. ‘82년생 김지영’이 ‘김지영 세대’라 부를 수 있는 주체를 발견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 호명은 차별받은 당사자를 가리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줄여 나가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어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영토’는 변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통해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CREDIT 글 | 박혜진 (민음사 문학 편집자, 문학평론가)
사진 | 이진혁(Koi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