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앤 플로우

2019.11.01 페이스북 트위터


넷플릭스(Netflix)가 래퍼 경연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힙합 역사 속에서 터부시해온 ‘래퍼가 다른 래퍼에게 (공개적으로) 심사받는 상황’을 과연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룰 것인가?
2019년 10월 9일, 드디어 ‘리듬 앤 플로우(Rhythm + Flow)’가 베일을 벗었고, 설득된 것을 넘어 적잖은 감동까지 받았다.

항간에서는 힙합과 경연이라는 키워드만으로 ‘리듬 앤 플로우’를 ‘미국판 쇼미더머니’라고 칭한다. 일견 맞는 비유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시놉을 제외하면, 두 프로그램 사이의 온도차는 상당히 크다. 우선 ‘리듬 앤 플로우’ 참가자 중엔 이름 있는 래퍼가 없다. 프로와 아마추어, 베테랑과 신인에 상관없이 한국힙합 씬에서 알려진 거의 모든 래퍼가 뛰어든 Mnet ‘쇼미더머니’와 달리 전부 신인, 혹은 무명이다. 가슴팍에 이름 대신 번호표를 단 이들이 도떼기시장 같은 분위기의 무대에 늘어서서 심사를 받는 민망한 예선 장면 따위도 없다. 물론, 기성 래퍼는 있다. 일례로 4화 ‘시카고 오디션’ 편에 등장한 사샤 고 하드(Sasha Go Hard)는 챈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 가 팬이라고 밝혔을 정도로 지역 씬에서 인지도를 쌓은 래퍼다. 그러나 그 역시 힙합 씬 전체에서 보자면 무명이나 다름없다. 차세대 힙합스타를 뽑겠다는 프로그램의 취지가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비슷한 목적을 내세웠으나 이전 회차의 우승자, 심지어 심사위원이었던 이들까지 떨어진 약발을 끌어올리고자 도전자 신분이 되어 재출연을 거듭하는 ‘쇼미더머니’와는 확연히 다르다.

다음, 심사위원의 권위가 확실하다. 티아이(T.I.)는 자타가 공인하는 ‘남부 힙합의 왕’에 가장 가까운 아티스트이자 사업가다. 그는 2000년대 힙합의 흐름을 주도한 트랩 뮤직(Trap Music)의 창시자이며, 이를 통해 90년대까지만 해도 동부와 서부에 밀려 변두리 취급을 받던 남부를 힙합의 중심지로 끌어올린 인물 중 한 명이다. 카디 비(Cardi B)는 ‘최초의’ 기록을 계속 갱신 중인 랩 슈퍼스타다. 대표적으로 그래미 어워드에서 ‘랩 앨범’ 부문을 수상한 최초의 (솔로) 여성 래퍼이며, 두 개의 빌보드 차트 1위 싱글을 보유한 최초의 여성 래퍼다. 챈스 더 래퍼는 21세기 힙합 세대의 상징과도 같다. 그는 온라인에서 공개한 믹스테입(Mixtape)만으로 엄청난 호평을 이끌어내고 팬덤을 구축했다. 그 결과 스트리밍만으로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한 최초의 래퍼이자 ‘최고의 신인상’ 부문을 수상한 최초의 남성 래퍼가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모두 화려한 기록 이전에 끝내주는 랩 실력과 다수가 인정하는 앨범을 최소 한 장 이상 갖고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세 아티스트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순 있어도, 심사위원으로서의 권위마저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각자 뚜렷한 주관과 잣대를 기준으로 솔직하고 현실적이며, 전문적인 심사평을 날리는 모습을 본다면 더더욱 말이다. 에피소드마다 게스트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래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음악적인 역량이나 성과는 뒷전이고, 단지 그때그때의 이름값만으로 심사위원석을 내어주는 ‘쇼미더머니’를 떠올리면, ‘리듬 앤 플로우’ 심사위원진의 존재감이 더욱 도드라진다.

특히, 제작진과 참여 래퍼, 어느 누구도 “힙합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지 않는다. 시즌 내내 ‘차세대 힙합스타 발굴’이라는 취지에 충실하다. 그 사이사이로 힙합의 장르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을 녹이는 지점에선 많은 이가 ‘쇼미더머니’에서 그토록 갈구하던 힙합에 대한 리스펙트(Respect)를 느낄 수 있다. 당연히 힙합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지점도 찾아볼 수 없다. 제작진이 고심한 흔적은 경연 항목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샘플링’이 대표적이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주류 음악 스타일 역시 변화해왔지만, 샘플링은 여전히 힙합 프로덕션의 핵심 요소다. 제작진은 이 경연을 통해 오늘날 많은 이가 때때로 간과하는 힙합음악의 가장 전통적이고 동시에 중요한 부분을 재각인시킨다. 심사위원과 참가자들의 '출신지부심'을 잡아낸 장면에서도 힙합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90년대 동부와 서부의 선 넘은 라이벌전이 결국, 피를 보고 나서야 종료된 이후, 대통합의 시대가 열렸지만, 아직도 지역색은 힙합 아티스트들의 주요 동력이다. 오디션 지역을 선정한 기준부터 의미가 남다르다. 힙합의 탄생지 뉴욕, 뉴욕과 함께 90년대 힙합의 또 다른 메카였던 로스앤젤레스, 2000년대 힙합의 메카 애틀랜타, 오늘날 의식 있는 가사를 쓰는 래퍼를 가장 많이 배출 중인 시카고까지. 한편으로 ‘리듬 앤 플로우’는 오디션 형식을 빌어 연출한 힙합 다큐멘터리 같다.

한국 방송에서도 볼 수 있어 익숙할 랩 배틀을 다루는 방식도 수준이 다르다. 그들은 힙합문화 내에서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요소인 랩으로 벌이는 싸움을 보여주기 위해 랩 배틀계의 산증인 스맥(SMACK)을 사회자로 초대한다. 그는 유명한 랩 배틀 대회인 ‘얼티밋 랩 리그(Ultimate Rap League)’를 론칭했으며, 역사적인 프리스타일, 배틀 랩 영상을 기록한 스맥 DVD 시리즈를 만든 인물이다. 이처럼 다루고자 하는 분야의 중요인사를 초빙하는 것은 그 분야에 리스펙트를 표하는 대표적인 방식 중 하나다. 본인들이 불러일으킨 혐오 논란에 대한 방어기제로써 ‘힙합은 원래 공격적이다.’를 말하기 위해 랩 배틀을 이용하던 ‘쇼미더머니’가 오버랩 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이상의 비교를 떠나서도 일단 ‘리듬 앤 플로우’는 보이는 부분이 멋있다. ‘멋’은 힙합 관련 콘텐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역동적인 랩 배틀 현장과 최종 경연 무대는 물론, 심사위원과 참가자,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지역의 거리를 담을 때에도 연출진은 멋을 놓치지 않는다. 이는 랩, 힙합이라는 외피만 둘렀을 뿐, 카메라워크, 편집, 연출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기존 오디션 프로그램의 포맷을 복사 후 붙여넣기 한 ‘쇼미더머니’와의 궁극적인 차이다. 비단 극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와 예능에서도 영상의 질감, 연출 및 편집 기술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발전시켜 온 저들의 행적을 체감할 수 있는 지점이다.

혹자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힙합이 주류이기 때문에 ‘리듬 앤 플로우’ 같은 프로가 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힙합이 처음부터 주류였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주류가 되기 이전에도 “힙합의 대중화를 위해”라면서 장르와 문화를 왜곡하거나 왜곡되는 것을 눈감고 넘어가지 않았으며, “힙합은 원래 그래.”란 태도로 모든 논란을 무마하려 하지 않았다. 토대가 탄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심지어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리듬 앤 플로우’는 과거의 힙합과 지금의 힙합을 존중하는 제작진과 아티스트의 신념 및 태도, 그리고 오랫동안 쌓인 음악 프로그램 연출 노하우가 시너지 효과를 내어 나온 결과다. 결승전 바로 직전의 경연에서 탈락한 참가자에게 챈스 더 래퍼가 건넨 한마디, “이 프로그램이 당신에게 아티스트 자격을 부여해주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미 아티스트예요.”는 이 프로그램이 지닌 정체성과 품격을 대변한다. 그러니 ‘리듬 앤 플로우’에 ‘미국판 쇼미더머니’란 수식을 붙이는 건 당찮다. 그건 ‘리듬 앤 플로우’에 대한 명백한 디스다.




CREDIT 글 | 강일권 (‘리드머’,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