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의 선 넘기

2019.10.30 페이스북 트위터


*영화 ‘조커’, ‘배트맨 비긴즈’, ‘다크나이트’, 코믹스 ‘킬링 조크’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커는 감정이입 하기 쉽지 않은 빌런이었다. 기원이 밝혀지지 않은 이 빌런은 천재적인 두뇌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돈으로 상상을 넘어서는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런데 ‘조커’는 조커의 기원을 제시하면서 그를 우리의 다정한 이웃은 아닐지라도 현실 어딘가에 있을 수 있는 사람처럼 묘사한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천재도 아니고, 뛰어난 육체적인 능력도 없다. 하지만 민간인도 총기를 살 수 있는 미국은 그에게 총을 쥐여 줬고, 사람들은 가난한 광대인 그를 무시하거나 괴롭힌다. 광대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아서 플렉이 분장을 지우지 않은 채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자, 언론은 ‘KILL THE RICH'라는 헤드라인으로 그의 살인이 빈부격차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한다. 그 결과 조커를 통해 전파된 ‘KILL THE RICH’의 메시지에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광대 분장을 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조커’의 끝에 있는 것은 악인의 탄생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아이콘의 등장이다. 시민들 주변에 보이던 평범한 광대가 살인을 통해 폭동의 한가운데에서 환호를 받는 영웅이 된다.

 

조커의 기원을 밝히며 빌런을 사회적인 아이콘의 자리에 놓는 ‘조커’의 이야기는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 배트맨이 사회적 아이콘이 되는 과정의 미러링이나 다름없다.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 한 사람이 고담시의 모든 범죄를 막지는 못한다. 대신 그는 박쥐의 이미지를 활용해 대면한 범죄자에게 공포를 심어주고, 미디어가 그의 이미지를 전파하면서 그는 범죄자에게 공포의 상징이 된다. ‘조커’는 질문한다. 조커도 배트맨처럼 사회적인 아이콘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배트맨이 되고 싶을 이유가 있을까? 매일 밤 박쥐 가면을 쓰고 범죄자들과 싸우면서도 죽지 않으려면 브루스 웨인처럼 엄청난 재력과 기술력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육체적 능력이 필요하다. 반대로 ‘조커’는 누구나 조커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조커 가면을 쓰고 ‘KILL THE RICH’만 외치면 된다. 보상도 있다. 아서 플렉처럼, 당신도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폭력을 휘두를수록, 당신은 영웅이 될 것이다.

 

‘조커’의 등장은 조커가 코믹스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배트맨의 숙적이 되고야 말았다는 확인처럼 보인다. ‘조커’에는 배트맨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직 어린 브루스 웨인(단테 페레이라-올슨)만 있다. 그러나 배트맨이 등장한 작품들 이상으로 배트맨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조커’에서 브루스 웨인의 부모는 광대 가면을 쓴 누군가에게 총격을 당해 죽는다. 이제 브루스 웨인의 원수는 어느 날 우연히 만난 강도가 아니라 ‘KILL THE RICH’를 외치던 많은 조커 중 한 사람에게 죽은 것이 됐다. 배트맨을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죽인 범인들은 생계를 위해 절도를 하다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치안이 불안정한 고담시에서 매일 밤 누군가 겪는 범죄가 자신에게 벌어졌다. 브루스 웨인이 특정 상대가 아닌 범죄 전체와 싸우며 고담시에 평화를 가져오려는 이유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범인이 재판장에서 갱의 총격으로 죽기도 한다. 부모의 원수가 죽었지만, 그럼에도 브루스 웨인은 자신이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반면 ‘조커’의 세계관에서, 앞으로 배트맨의 활동은 조커에 대한 구체적인 원한에서 출발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빈부격차의 프레임이 들어선다. 아서 플렉처럼 조커는 가난을 비롯한 고담시의 사회적인 문제가 낳은 결과물이다. 그리고 배트맨은 다시 조커에게 복수하게 될 것이다. 배트맨과 조커는 각각 정의와 범죄의 아이콘이지만, ‘조커’는 배트맨과 조커 모두 개인적인 이유로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배경을 제시한다. 너의 악행과 나의 정의는 같은 의도에서 출발했다는 주장. 보다 확장하면, 아서 플렉이 지하철에서 곤경을 빠진 여자를 돕다 총을 쏜 것과 배트맨이 범죄자들과 싸우면서 죽이지는 않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있다는 논리. 부자 슈퍼 히어로인 배트맨과 달리 가난한 빌런이라는 새로 만든 팩트도 더해진다. 여유로운 부자 슈퍼히어로의 정의는 빈민 빌런에게도 가능한가. ‘조커’는 영화 전체를 통해 배트맨을 조커와 다를 것 없는 존재로 이른바 ‘물타기’ 한다. 지금까지 조커는 작품 속의 배트맨을 괴롭혔다. 하지만 ‘조커’는 작품 바깥에서 배트맨의 필요성을 지우려 한다.

 

‘조커’는 배트맨과 조커의 차이를 정의(Justice)로 나누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은 어느 계급인가?’

 

아서 플렉은 어머니 페니 플렉(프란시스 콘로이)의 편지를 근거로 자신이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 토마스 웨인(브래트 컬렌)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서 플렉은 토마스 웨인과의 첫 만남에서 주먹을 맞는다. 그를 만나기 전, 아서 플렉은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 브루스 웨인을 만났다. 그때 그의 얼굴을 동의 없이 만지기도 했다. 또한 어머니의 주장은 망상에 의한 것이었다. 이 사실들을 아는 토마스 웨인 입장에서 아서 플렉은 위험한 사람이다. 하지만 ‘조커’는 건장한 체구에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은 토마스 웨인과 뼈만 남은 것 같은 앙상한 몸에 허름한 옷을 입은 아서 플렉을 대비시킨다. 앞의 맥락을 빼면, 토마스 웨인이 아서 플렉을 때리는 장면은 강자가 약자에게 날리는 폭력처럼 보인다. ‘조커’는 배트맨의 기원에 선의로 고담시를 지켜온 웨인 가문 대신 가난한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오만하고 덩치 큰 부자의 이미지를 넣는다. ‘조커’의 관객이 아서 플렉과 같은 계급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조커’는 경제적으로 지구상의 0.0000000001%에 속할 토마스 웨인과 그 외의 사람들의 차이를 강조한다. 이 영화의 세계에서는 소득이 꽤 높은 사람도 ‘KILL THE RICH’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토마스 웨인 같지 않다면.

 

아서 플렉이 광대 분장을 하고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이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했을 때, 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광대라고 자백한다. 이것은 반성이 아니라 울분과 원한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자백을 통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그는 누구도 자신을 배려하지 않았다고 분노한다. 아서 플렉은 가난하고, 정신적인 장애를 겪고 있으며, 병든 어머니도 돌봐야 했다. 자신은 잊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에 큰 불행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총이 생겼다. 그러니까, 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서 플렉이 무단 침입한 곳은 부자의 저택이 아니라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재지 비츠)의 집이었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이유는 광대 일을 하러 간 병원에 총을 가져가서다. 같은 직장의 랜들(글렌 플레쉬러)이 그에게 총을 준 뒤 모른 척한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그가 토마스 웨인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어른이 아닌 브루스 웨인에게만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었다. 아서 플렉은 토마스 웨인이 아니라 가난한 여자, 아이, 또는 열린 공간에서 비무장한 사람에게 위협적이다. 그가 조커가 되고, 사람들이 광대 가면을 쓰고 폭동을 일으켜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부자들은 폭동이 일어나면 총기로 무장한 경호원을 고용할 수 있다. 위험한 쪽은 어떤 보호도 없이 그 무리에 끼지 않은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다.

 

‘조커’는 아서 플렉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스토리 자체가 아서 플렉의 현실과 망상이 뒤섞여 있다. 어쩌면 그의 모든 범죄가 상상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관객은 아서 플렉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그의 입장을 전달받는다. 그는 무단침입한 집에 사는 여자가 보고 싶었을 뿐 다른 어떤 의도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병원에 총을 가져간 건 부주의의 결과였을 수도 있다. 브루스 웨인이 단지 귀여워서 얼굴을 만진 것일 수도 있다. 아서 플렉이 심리 상담사나 머레이 프랭클린에게 어필하는 것도 자신의 말을 듣고 이해해달라는 것이다. 아서 플렉 버전의 정의다.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떻든 믿어주는 정의. 나의 사연과 괴로움을 들어주는 정의. 배트맨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일에 대한 최소한의 윤리적 선으로 삼는다. 하지만 정의의 기준 대신 계급의 기준이 제시되는 ‘조커’에서 정의는 각자 주관적인 것이 된다. 정의는 공공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얘기를 들어주는 것, 또는 내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된다.

 

아서 플렉은 토크쇼에서 살인의 이유 중 하나로 자신은 잃을 게 없다는 점을 든다. 그 말을 증명하듯, 자신의 주장에 반박하는 머레이 프랭클린을 총으로 쏴서 죽인다. 지하철에서 여성을 괴롭히던 남자들, 랜들, 자신에 관한 비밀을 속인 어머니 등 이전의 살인에는 그나마 상대가 자신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라도 있었다. 하지만 머레이 프랭클린은 아서 플렉이 존경하던 코미디언이었고, 그의 토크쇼 출연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서 플렉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그를 죽인다. 토론은 사라지고 폭력이 남고, 쇼의 주인공은 노년의 능숙한 진행자에서 광대 분장을 한 코미디언이자 살인자로 바뀐다. 아서 플렉은 토마스 웨인이 아버지라 믿었고, 머레이 프랭클린이 토크쇼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토마스 웨인이 그 사실을 부정하고, 머레이 프랭클린과 자신의 생각이 다르자 총을 꺼낸다. ‘조커’는 계급과 세대 양쪽에서 사회의 중심에 서지 못한 남자의 목소리를 듣게 한다. 이유는 그가 부자와, 정부와, ‘꼰대’들에게 무시당하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여자들이 그를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도 덧붙인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 죽여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잃을 게 없으니까. 모순이 아니다. 협박이다.

 

‘조커’는 조커가 머레이 프랭클린을 죽이고 쇼의 카메라를 장악하는 순간을 영화의 클라이막스로 삼는다. 그가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순간은 사실상 조커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연설이고, 그가 광대 분장을 하고 토크쇼에 오기까지의 과정에는 인터넷의 밈이 된 그 계단에서 춤추기를 포함, 이른바 ‘간지’나는 장면들을 집중적으로 집어넣었다. 이것은 슈퍼히어로의 서사에서 주인공이 각성을 하고 코스튬을 입고, 결전에 나서는 순간과 같다. ‘조커’는 이 카타르시스 넘치는 순간을 빌런의 탄생에 이용한다. 잃을 게 없으니 아무 때나 총을 쏠 수 있다는 남자의 목소리가 비겁해 보이지 않도록 ‘간지’까지 준다. ‘조커’는 1988년 발표된 코믹스 ‘킬링 조크’를 원작으로 했다. 기원 없는 빌런 조커에게 구체적인 과거를 부여하는 아이디어는 이 작품에서 왔다. 그러나 ‘킬링 조크’에서 현재 시점의 조커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빌런이다. 독자가 감정 이입할 여지는 적었고, 조커의 과거는 오히려 그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인기 코미디언이 꿈이었던 그는 어느 날 불행한 일을 겪고 지금의 빌런이 됐다. 그러나 그가 과거의 불운을 핑계 삼기에는 배트맨이라는 반례가 있다. 브루스 웨인도 불행한 하루를 겪었지만, 조커와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사적으로 범죄와 싸우는 자경단은 누구에게도 감시받지 않는 폭력이다. 그가 스스로 정의를 규정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슈퍼히어로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 어떤 상황이든 최후의 윤리적인 선을 지키는 것으로 견뎌왔다. 그것을 고통 속에서도 고결함을 향해 다가서는 인간의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30여 년이 지나 발표된 ‘조커’는 ‘킬링조크’에서 조커가 했던 주장을 더욱 매력적으로 포장한다. 그것도 배트맨이 없는 세상에서.

 

시대정신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조커’에게 시대정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쪽에 가깝다. 내 기분이 곧 정의고, 내 입장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내 마음대로 정의를 판단하고, 형벌을 내린다. 그 모습이 ‘간지’나길 꿈꾼다. ‘조커’의 결말이 폭동으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이다. 조커의 살인은,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영웅적인 행동이 된다. 영화에서는 폭동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들의 숫자가 더 많아지고, 조직화가 되고, 누군가 정치 자금을 대면 아서 플렉은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도 있다. ‘다크 나이트’의 사고를 당하기 전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 같은 검사가 아니면 그의 범죄를 기소할 검사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이 세상의 오해를 뒤집어쓴 채 홀로 도심을 질주하는 것으로 끝났다. 반면 ‘조커’는 자신의 지지자를 만들었다. 공공의 정의란 무엇이고,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슈퍼히어로는 외로워진다. 반면 자신의 정의를 폭력으로 관철시키는 빌런에게 필요한 것은 머릿수다. 논리와 토론 대신 머릿수가 가진 힘으로 정의를 바꿀 수 있는 세상. 이것을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누구인가. 아서와 같은 아파트에 살던 여자는 아닐 것이다. 아서 플렉과 같은 직장에 있던 왜소증이 있는 게리(리 길)도 아닐 것이다. 아서 플렉이 랜들을 죽일 때, 같은 장소에 있던 게리는 그대로 보내준다. 직장에서 유일하게 잘 해줬다는 이유다. 바꿔 말하면, 아서 플렉은 언제든지 게리를 죽일 수 있다. 병들었던 아서 플렉의 어머니나 토마스 웨인처럼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부자도 아닐 것이다. 아서 플렉이 두 형사에게 쫓기던 지하철 안, 폭동을 하러 가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어떤 인종, 성별, 나이대를 가졌는지 기억해 보자.

 

아서 플렉은 지하철에서 위협을 받던 여자가 아닌 세 명의 백인 남자를 죽인다. 그때 그는 총으로 한 번에 그들을 죽였다. 랜들을 죽일 때는 흉기로 자신의 집이 피범벅이 되도록 잔인하게 살해한다. 랜들이 아서 플렉보다 덩치가 더 컸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올바른 답은 죽이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를 죽일 때는 질식해 죽어가는 장면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머레이 프랭클린을 죽일 때, 그는 살인과 함께 미디어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스타 또는 교주처럼 행세한다. ‘조커’에서 아서 플렉의 폭력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더 잔인하고, 충격적이고, 과시적으로 바뀐다. 그 사이 아서 플렉은 자신을 빌런으로 자각하고, ‘간지’나게 차려입고 살인을 하러 나서며, 폭도들의 영웅이 된다. 슈퍼히어로의 서사로 빌런의 탄생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갈수록 극적으로 연출되는 폭력은 빌런의 탄생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치다. ‘조커’는 지금 광대 가면을 쓰고 싶은 사람들을 다룬다. 하지만 그것은 빌런이 되고 싶은 사람들에 관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조커’는 그들에게 ‘간지’나는 폭력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힘을 깨달으라고 부채질한다. 영화 자체보다 영화를 본 어떤 사람들이 일으키는 현상이 더 중요해 보이는 이유다. 그들은 왜 조커가 되고 싶어 할까. 이 영화의 선동에 넘어가서인가, 넘어가고 싶었던 건가? 다시 질문. 이 영화를 본 당신이, 조커가 되고 싶은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리고, 그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



CREDIT 글 | 강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