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프리 공연│① 맛있는 빨간약

2019.10.01 페이스북 트위터


1막 : 젠더프리의 시대
지난 7월 1일, 2년 만에 연극 ‘오펀스’의 재연공연 캐스트가 발표되고, 연극, 뮤지컬에 관심 좀 있다는 사람들의 SNS는 꽤나 술렁거렸다. 연극 ‘오펀스’는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이 어느날 50대 중년의 시카고 갱 해롤드를 우연히 납치해 오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이야기로, 남성 캐릭터 3인으로 구성된 연극이다. 이번 공연에 정경순, 최유하, 최수진이라는 여자배우 셋이 페어로 참여한다는 소식은 자연스럽게 언론에 오르내렸고, 극의 시연장에서도 이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김태형 연출은 기자간담회에서, "남성 3인극을 여성페어로 올리기 위해 컴퍼니와 원작자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무대에서 인간이 전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야기라면 그 화자가 남자인가 여자인가는 중요치 않다. 이 이야기가 여성의 입을 통해 전해질 때, 또다른 강력한 힘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라며 영향력 있는 연출가로서 여기에 힘을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연극 ‘오펀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무대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배우들은 본인이 갖고 있는 성별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대표적으로 이지나 연출은 2015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헤롯왕 역에 김영주 배우를, 2017년 ‘광화문 연가’에서 정성화 배우가 맡은 배역인 ‘월하’에, 2018년 ‘더데빌’에서 그동안 남자배우들이 해온 ‘엑스’ 역에 차지연 배우를 기용해 꾸준히 젠더프리를 시도해왔고, 올해 ‘도리안그레이의 초상’에서도 배역마다 남녀 배우를 고루 캐스팅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시카고’나 ‘마틸다’ 같은 작품에서도, 극에서 캐릭터의 성별과 그 배역을 소화하는 배우 본인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음을 생각하면 국내외를 통틀어 그간의 사례가 결코 적지는 않다.

하지만 2019년 지금 여기 대한민국처럼 사회적인 분위기를 타면서 젠더프리 캐스팅이 이토록 화제가 되고, 깊은 관심을 끄는 때가 과연 있었나 싶다. ‘오펀스’처럼 기존극의 남성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연기하게 하는 시도는 물론이요, 단순히 시도를 넘어 극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의 하나로 젠더프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창작진도 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극과 캐릭터의 성별을 반전시켜, 이야기를 확대하고 숨겨진 이야기를 만들어보거나 좋아하는 여자 배우들에게 남자 배우들이 해 오던 입체적인 주인공을 연기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아졌고, 현실화의 바람과 요청도 거세다.

삼국지를 소재로 주유, 제갈량 등의 남자 캐릭터를 여배우가 연기한 ‘적벽’, 햄릿을 현대극으로 변주하면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함익’, 혼성 캐스트를 시도해 두 명의 여배우들만으로 남녀 멀티 캐릭터를 연기해 극을 이끌어나가게 했던 뮤지컬 ‘해적’, 남학생들의 예술학교 이야기를 여학생들의 이야기로 바꾸어낸 연극 ‘B클래스’, 연극의 가치와 여성 인물의 진실에 접근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여배우들을 통해 전달했던 연극 ‘비평가’, 현재 공연 중인 연극 ‘오펀스’, 모두 2019년 상반기를 지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2막 : 젠더프리와 여성서사, 현실의 벽을 넘는 법
젠더프리 캐스트로 공연되는 극을 보고 나오는 관객의 반응은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간 남자 배우가 연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게 선입견이었다는 깨달음, 두 번째는 여성배우들의 역량이 이미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배역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그들을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직시, 마지막으로 다른 극에서도 여성의 서사를 깊이 있게 읽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양가감정이다.


‘오펀스’나 ‘B클래스’ 같은 연극을 보면서는, 여성이 어떤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에 아무 제한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오히려 불필요한 남성성, 종종 위험하게 표현되곤 하는 폭력성을 걷어내고나니, 이야기의 진실이 더 잘 보인다는 평이 도드라진다. 연극 ‘비평가’에서 여배우들이 연기하는 남자 연출가와 남자 비평가를 보고 있으면 그들이 여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하는 꼴이 우습게 느껴진다. 생각보다 여배우들은 잘 준비되어 있었다. 배역에 대한 갈증, 여성 배우들과 함께 일할 기회, 거기서 오는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케미스트리. 과거 매니아들의 눈에만 보였던 관계와 흐름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배우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기회는 보다 흔해진 것 같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남자 배우들을 관대하게 봐왔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기도 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기를 잘 수행해내는 여자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관객들이 여배우들에게 얼마나 엄격했는지, 얼마나 많은 요구를 해왔었는지도 깨달아가고 있다.

다양하고 과감해진 시도를 지켜보며, 기존의 극에서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은 관객들의 또다른 변화다. 젠더프리 덕분에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인지, 여성 캐릭터를 관심 있게 바라보면서 젠더프리의 경향성이 확대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여성의 이야기가 반가우면서도, 캐릭터의 선택권이 제한되거나, 전형적으로 캐릭터가 그려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는 감상이 적지 않다. 여성 서사 자체가 적지는 않다. 하지만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며 다양한 사건을 주기보다는 여성성을 주인공의 유일한 욕망과 정체성으로 가정해 강간이나 실연, 아기를 잃는 사건들로 고난을 주는 방식의 이야기가 많고, 이야기의 깊이에 비해 여자 주인공의 선택권은 제한되는 경우가 흔하다. 과거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라서, 현재의 상황을 반영한다면서 여성이 자신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과 싸우는 이야기를 답습하게 되는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올해 초 김선영, 차지연 배우가 주인공을 맡으며 성공적으로 공연됐던 창작뮤지컬 '호프'는 꽤나 잘 만든, 완성도 높은 여성 서사로 호평을 받았다. 동네에서 괴짜로 이름난 여성 노인인 ‘호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숨겨진 이야기를 잘 풀어냈지만, 호프의 세계가 넓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호프가 집착의 대상인 원고지를 의인화해 표현한 배우는 남자 배우라는 것,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호프에게 선택권이 많지 않고 그래서 주인공의 현실 세계가 넓어지지 못한 채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던 것은 다소 아쉽다. 원고지 캐릭터를 남자배우가 연기하게 하면서, 좋은 여성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벡델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들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현재 공연 중인 '시라노'의 여자 주인공 록산은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라는 두 남자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2017년 초연 당시, 록산은 사건을 일으키는 주요 갈등의 축이자 매개체로, 주인공인 시라노의 삶을 고난으로 이끌어 이른바 ‘민폐’ 캐릭터로 비판을 받았던 바 있다. 2년 만에 재연되며 록산의 캐릭터는 크게 변화했는데, 시라노와 같은 삶을 지향하고, 그를 닮고 싶어하고, 자신의 삶을 쟁취하는 적극적인 모습의 록산으로 좀 더 설득력을 갖췄다. 록산이 좀 더 이해하기 쉬워지고 설득력이 강해지면서 이에 감정이입하는 관객들도 많아졌고, 전달이 어긋난 사랑의 비극은 더 뚜렷해졌다. 설득력을 갖춘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서 록산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는 것 때문에 여성 서사를 읽는 관객들의 마음은 복잡해지는 것 같다.


지난 여름 공연됐던 ‘비너스인퍼’는 예술에 대한 ‘자기만의 원칙’이 확고한 남성 연출가 토마스와 그가 각색한 연극 ‘비너스인퍼’의 여자주인공 역을 따러 오디션을 보러 온 여자 배우 벤다가 등장하는 2인극인데, 관계를 전복하고 캐릭터를 재발견하게 되는 즐거움이 있었던 작품이다. 초연에 이어 '비너스인퍼'를 연출한 김민정 연출은 본인의 SNS 계정을 통해 “초연에 풀리지 않은 채로 모호하게 갔던 부분을 재연에서는 탈탈 털어 명확하게 했다”라고 말했고 확실히 초연보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기를 거부하고, 욕망 당하는 것에 반대하며, 스스로 극을 해석하고 연출과 함께 극을 만들어나가는 벤다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여성이 스스로 주동인물이 되는 이야기를 당장 만들어 내는 일 말이다. 그래서 젠더프리는, 여성의 선택 제한이라는 벽을 가볍게 깨버리고, 그동안 남자 배우들에게만 주어졌던 입체적인 배역, 그가 정의롭든, 정의롭지 않든, 호감이 드는 인물이든, 불쾌함이 드는 인물이든 '성별'이라는 장애물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캐릭터들을 여성에게 당장 쥐어달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3막 : 여성들에게 묻고, 여성들에게 배우다
젠더프리가 ‘대세’처럼 보이는 2019년 공연계에서도 젠더프리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젊은 연출가들을 중심으로 연극 분야에서 비교적 시도가 활발한 것 같고, 창작극의 경우 배역의 성별을 애초에 지정하지 않고 극을 만들기도 하지만, 기존에 사랑받아 왔던 대형 뮤지컬의 경우에는 배우들의 팬들과 뮤지컬 마니아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원작자의 허락을 얻어야 함은 물론이요, 곡의 편성, 음악 편곡 작업도 꽤나 번거로우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는데 현재의 흐름에 대한 확신과,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 할 수 있겠다.

젠더프리로 캐스팅한 극은 기대한 것을 보고, 기대 이상을 가져가는 재미가 크다. 예술가와 향유자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인식과 캐릭터가 새롭게 변주되고, 재발견되는 경험은 언제고 창작물을 만나는 데 가장 큰 기쁨이 된다. 캐릭터의 정체성은 성별에 국한하지 않으며 관객들이 세상을, 예술을 해석하는 수준은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어떤 관객의 시선에 맞추어 극을 만들어 갈 건지 공연계의 보다 적극적인 응답이 필요하다. 관객의 마음을 두고 경쟁하는 무대에 이제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 것이다. 여성이 여성에게 어필하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여성들에게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배울 기회다. 아직 힘이 있을 때 그것을 가치있게 쓰고 함께 기억되는 게 가장 좋다.




CREDIT 글 | 문주연 (칼럼니스트)
디자인 | 전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