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프리 공연│② 현재를 기록하고 미래를 기약하는 공연 다섯

2019.10.01 페이스북 트위터
매년 많은 작품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또 내려간다. 하지만 2019년 올 한 해를 더욱 의미있게 만들어주는 공연계의 변화들이 눈에 띈다. 예년에 비해 늘어난 젠더프리 캐스팅의 시도와, 여성 배우의 힘을 보여주고 여성이 여성에게 더 많이 어필하기 시작한 지금, 현재와 미래를 아울러 놓치지 말아야 할 무대 위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다섯 개의 작품을 소개한다.



뮤지컬 ‘해적’ 앵콜 공연 예정

초연 : 2019년 3월 10일~2019년 5월 19일 드림아트센터 2관 (종료)
앵콜 : 2019년 11월 2일~2019년 12월 1일 예스24스테이지 2관 (예정)

소년 루이스는 해적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의 친구라고 주장하는 해적 캡틴 잭과 함께 유품인 보물섬 지도를 들고 보물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명사수 앤과 검투사 메리를 만나게 되고 이들의 모험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캡틴 잭을 비롯하여 여해적 앤 보니와 메리 리드 등 실존인물의 이야기를 소재 삼아 상상력을 풀어낸 2인극. 한 명의 배우가 성별이 다른 두 명의 인물(루이스와 앤, 잭과 메리)을 맡게 되며 각 배역에 혼성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던 뮤지컬 ‘해적’은 초연으로 약 두 달간의 공연 기간 동안 약 200여석의 공연장을 매 회차 전석 매진시켰다. 그리고 그 인기를 입증하듯 다가올 11월 2일부터 한 달간 앵콜 공연을 앞두고 있다. 사랑을 받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성이 중심이 된 새로운 서사도 그중 한 가지로 보인다. 많은 작품들 속에서 수동적이고 소모적인 인물로 그려지던 여성이 아닌, 능동적인 여성들 간의 유대감은 실존인물이라는 점까지 더하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혼성 캐스팅 중 여성 캐스팅이었던 임찬민(루이스/앤)과 랑연(잭/메리)의 만남은 유일한 여성 페어로 첫 번째 티켓 오픈부터 뜨거운 기대를 받았고, 두 번째 티켓 오픈 때는 눈에 띄게 늘어난 회차로 그 인기를 입증하였다. 무대 위의 유대감이 무대 아래까지 함께하는 것은 공연을 함께 완성시켜가는 배우와 관객 사이에 자주 보이는 것이지만, 무대 위와 아래가 온전히 하나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두 배우는 그것을 보여주었다. 다가올 겨울 한달 동안 초연 배우들이 모두 함께 돌아오는 ‘해적’ 앵콜 공연에서 그 유대감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연극 ‘오펀스’ 현재 공연 중

2019년 8월 24일~2019년 11월 17일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좀도둑질로 동생을 돌보며 살아가는 트릿과, 형의 두려움과 과보호로 어린 시절에 머무른 채 지내야 하는 필립. 트릿이 해롤드라는 시카고 갱스터를 납치해오며 두 고아 형제의 생활에 변화가 생기고 세 사람은 가족이 되어간다.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아이와 어른이 되지 못하도록 강요받은 아이, 그리고 혼자 어른이 된 어른. “넌 이제 다시는 길을 잃지 않을 거다”라는 해롤드의 말은 필립뿐 아니라 트릿과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특히 재연 ‘오펀스’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을 통해 여성의 목소리로 전달해주는 격려와 위로는, 사회적 권력이 주어지지 않은 채 혼자 많은 책임과 압박감, 거친 세상을 견뎌내며 강제로 어른이 되거나 혹은 아이로 머물러 있어야 했던 여성들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가치 있는 이야기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듣는 이와 말하는 이가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때 미치는 영향과 형성되는 공감대가 좀더 울림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뮤지컬 ‘시라노’ 현재 공연 중

2019년 8월 10일~2019년 10월 13일 광림아트센터 BBCH홀

뛰어난 시인이자 전사인 시라노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록산을 연모하지만, 자신의 괴상한 코 때문에 고백하지 못하고 록산의 사랑을 돕게 된다. 록산의 연인인 크리스티앙의 편지를 대필해주고, 전쟁터로 떠난 뒤에는 그를 지켜준다. 재연 ‘시라노’에서 보여주는 록산은 시라노를 동경하여 검술을 배우고 여성문학회를 하는 등 진취적인 모습이 더해졌는데, 전쟁터를 지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오는 용기를 지니고 있고 아름다운 시에 매료되어 문학적 욕망을 품고 있던 인물성이 제대로 두드러지지 못했던 초연의 록산을 좀 더 구체화시켜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초연에 비해 원작과 많은 부분이 달라지면서 시라노의 영웅적인 측면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현대에 맞춰 달라진 록산과, 함께 군복을 입고 가스콘 부대원으로 분하여 무대 위를 누비는 등 역할의 변화를 보여준 여자 앙상블 배우들의 모습은 2019년에 돌아온 ‘시라노’에서 주목할 점이다.


연극 ‘비너스 인 퍼’ 공연 종료

2019년 7월 24일~2019년 8월 18일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고통에서 성적 만족을 느끼는 심리상태, ‘마조히즘’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L.R.von Sacher-Masoch)의 동명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한 작품. 마조히즘을 모티브로 한 소설을 각색한 새 연극의 오디션을 끝낸 연출가 토마스 앞에 여주인공 오디션을 보겠다고 나타난 벤다. 하지만 벤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토마스는 그대로 떠나려 하고 벤다는 그를 막무가내로 붙잡으며 오디션이 시작된다. 극 중 극 형태로 연출가 ‘토마스’와 배우 ‘벤다’, 오디션 대본 속의 ‘쿠솀스키’와 ‘두나예브’, 그리고 고대 그리스신화 속 ‘비너스’까지 오가며 펼쳐지는 무대 속에서 토마스는 완벽한 여주인공으로 분하는 벤다에게 장악당하고 둘 사이의 권력 관계가 뒤바뀐다. 평가를 하는 ‘연출’과 평가를 당하는 ‘배우’를 무대 위로 끌어내고, 동시에 그 안에서 성별로 인해 나뉘어진 권력을 보여준다. 벤다 역을 맡았던 배우 이경미가 “연극에 이런 독보적, 영웅적 여성 배역이 있어 놀랐다”(‘동아일보’)고 했던 인터뷰처럼 연극 뿐 아니라 뮤지컬을 통틀어 공연계에 과연 이런 여성 캐릭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무대 위 벤다는 평가당하고 소모되는 여성 캐릭터이기를 거부한다.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공연기간에도 불구하고 잘 쓰인 대본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여성 캐릭터, 젠더로 인해 강제로 주어졌던 권력이 뒤집히는 쾌감으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뮤지컬 ‘호프 :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공연 종료
2019년 3월 24일~2019년 5월 26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현대문학의 거장 요제프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싼 이스라엘 도서관과 평생 원고 옆에서 살아온 호프의 소송. 재판장을 빌어 ‘호프에게 원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지만 원고를 통해 호프의 인생을 보여준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그의 인생에 존재했던 선택 아닌 선택과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이유를 되물으며 관객이 여성 캐릭터의 현재와 배경을 비롯한 인물의 서사를 알게 하고 그로 인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동안 소모적으로 소비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 등 단편적으로만 그려지던 많은 여성 캐릭터가 자신의 이야기를 갖는다는 것은 여성 위주의 새로운 서사에 갈증을 느끼던 관객들에게 반갑게 받아들여졌다. 실화를 모티브로 하였다는 홍보 문구와 다르게 역사적 사실과 많은 부분의 고증을 달리 하여 잘못된 마케팅 전략이 아닌가 하는 비난을 듣기도 하였지만 여성이 오롯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감동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CREDIT 글 | 김서연(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