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이직│① 나의 일은 무엇인가

2019.06.18 페이스북 트위터


프리랜서로 2년을 일하다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한 지 딱 3개월째다. 일을 하려면 침대에서 책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고정된 사무실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제야 조금 익숙해졌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빌라선샤인은 밀레니얼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으로, 여성들이 일과 삶에 필요한 요소들을 배우고 서로 나누고 회사 밖 동료를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 콘텐츠 디렉터인 나는 이곳에서 오프라인 프로그램과 뉴스레터를 포함한 온라인 콘텐츠를 기획한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그 콘텐츠에 적절한 사람을 섭외한다는 점, 혼자 감당해야 하는 마감 시간만큼이나 동료나 파트너와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협업 시간도 길다는 점에서 이전 직업이었던 기자와 비슷한 맥락에 있는 일이다.

2017년 2월, ‘아이즈’에서 퇴사할 때만 해도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상상하지 못했다. 엔터테인먼트 전문 기자로 쉬지 않고 7년 정도 일하다 보니 지칠 대로 지쳤고, 잠시 쉬어야겠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매주 돌아가는 주간지 시스템 안에서 밀도 높은 글을 계속 써야 한다는 건 언제나 여러모로 힘든 일이었고, 그 고통을 버티면서까지 일을 더 잘 하는 기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7년을 일했기 때문에 더 성장하지 못한 채로 애매하게 경력만 더 쌓느니 이런 자신을 똑바로 보고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는 아주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사실 일의 미래나 기자라는 직업의 미래를 예측한 결정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선견지명이 내게는 없었고 그래서 그냥, 일단, 대책없이 회사를 그만뒀다. 아주 많지 않은 목돈(퇴직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얼마나 쉴지, 어떤 일을 해서 어떻게 돈을 벌며 앞으로의 생활을 이어나갈 것인지 전혀 고민하지 않은 채 말이다. 정말로 어쩌다보니 프리랜서가 되었고, 프리랜서가 되었는데도 프리랜서가 뭔지 잘 몰라서 스스로를 '백수'라고 부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행히 회사가 나에게 남긴 것은 생각보다 적지 않아서, 준비 없이 시작한 프리랜서 생활 치고는 꾸준히 일(주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 그래도 원고료라는 것은 워낙 적기 마련이라 한달 내내 열심히 글을 쓰고도 다음달을 걱정해야 할 때면 내가 왜 대책도 없이 퇴사했을까, 조금 침착하게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한 적도 많다. 출퇴근 해야 하는 회사가 없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분명 프리랜서의 큰 장점이었지만, 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늘 불안을 안고 지내야 했다. 내가 불안하면 일을 벌이는 타입이라는 사실을 이때 알았다. 어차피 불안할 거라면 잘 맞는 동료들과 이런 저런 재미있는 일이라도 벌여보는 게 나았고, 그래서 책도 만들고 잡지도 만들고 팟캐스트도 시작하고 여성 스탠드업 코미디쇼 '래프라우더' 같은 행사도 만들었다.

일을 많이 벌였으니 돈도 많이 벌었을까?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수입에 큰 변동은 없었다. 어떤 일은 좋은 성과를 냈지만 어떤 일은 실패했다. 대신 얻은 것들이 있었다. 어느 정도 정해진 시스템과 정해진 업무가 있는 회사 안에서 일을 할 때보다 훨씬 더 다양한 일을,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어 하다보니 예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 안에서 나의 능력을 이리저리 굴려보며 ‘일하는 나’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갈 기회를 갖게 되었다. 행사를 진행하거나 투자자를 설득하는 일(아쉽게도 이 일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오디오 콘텐츠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 등은 처음 해보는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나는 원하는 사람을 섭외하기 위해서 설득하는 메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협업을 할 때는 동료들과 어느 정도 수준의 정보까지 공유해야 하는지 모두 다시 배웠다. 내가 한 공간에 갇혀서 오랜 시간 일하는 방식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의 업무를 진득하게 붙잡고 있기보다는 순간순간 모드를 바꿔가며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프리랜서가 무엇인지 몰랐던 나는 약 2년 만에 '내 일을 둘러싼 규칙과 시스템을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프리랜서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됐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동안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일을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꾸려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프리랜서 생활을 계속하기에는 월별로 크게는 10배 가까이 차이 날 정도로 들쑥날쑥한 수입이 나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었고, 숫자로 드러나는 명확한 성과없이 다양한 일을 벌이는 데도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회사에 속한 기자로 7년 동안 느꼈던 피로감이 프리랜서로 일한 지 2년 만에 쌓인 것이다. 내가 그동안 했던 일의 맥락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업무가 아닐 것, 페미니스트로서 내 삶의 가치관을 훼손당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는 곳일 것, 되도록 여성들이 많은 환경일 것, 근무시간이나 방식을조정할 수 있는 곳일 것 정도의 기준을 아주 느슨하게 세워두고 천천히 회사를 찾기 시작했고, 마침 동료를 구하고 있던 지금의 회사에 합류했다.

기자로 7년, 프리랜스 에디터로 2년을 거치며 어느 정도 일의 노하우를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이곳 빌라선샤인에서 콘텐츠 디렉터로 일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심지어 예전과 달리 하나의 회사와 계약된 상태에서 프리랜스 에디터 혹은 작가로서 해오던 일들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일의 우선순위를 잘 판단하지 못하거나 스케줄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나 혼자 망하는 게 아니라 회사나 동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게 된다. 나에게 맞는 일의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규칙을 정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업무 진행 상황을 공유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기사로서의 콘텐츠가 아니라 한 회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콘텐츠는 어때야 하는지, ‘여성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디렉터'라는 직급은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하는지 등 일의 내용 역시 매일 새롭게 배워 나가고 있다.

가끔 생각한다. 기자로 계속 경력을 쌓았더라면, 정식으로 내 사업을 시작했더라면, 프리랜서로 꾸준히 버티며 일했더라면 어땠을까? 무엇을 선택했든 아마 지금처럼 또 새로운 상황에 부딪히며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들 위에 새롭게 배운 것들을 쌓아가며 일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직이나 전직, 창업 중 한 가지 길을 먼저 선택하기보다는 내가 무엇에 강하고 무엇에 약한지, 어떻게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일의 맥락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모든 회사에서 그럴 기회를 주지는 않고, 모든 사람이 프리랜서로 일할 수도 없다. 다만 사이드 프로젝트든 뭐든,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시스템의 바깥에서 일하며 나에게 맞는 시스템과 일의 내용을 직접 기획해보는 경험은 자신을 파악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된다. 그러다 실패하면? 그 크고 작은 실패에서 배운 것을 디딤돌 삼아 또 다른 일을 시도해보면 된다. 내가 해온 일의 궤적은 나만이 만들 수 있다는 걸 믿으면서 말이다. 



CREDIT 글 | 황효진 (빌라선샤인 콘텐츠 디렉터)
디자인 | 전유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