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셋이 만든 잔술집

2019.06.17 페이스북 트위터

©La Coupe 인스타그램

입버릇처럼 “언젠가 잔술집 차릴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언제 실현될지도 모르는 작고 먼 꿈이었지만 준비만은 늘 철저했다. 해외로 출장을 나갈 때마다 작은 잔술을 사서 모으고, 괜찮은 인테리어를 발견하면 차곡차곡 사진을 저장했다. “근데 일단 시집부터 가고 보자.” 잔술집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친구들은 이런 할머니 같은 말로 '촤아'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면 나는 물에 푹 젖은 강아지마냥 약간 기가 죽어서 이렇게 말했다. “야, 여자가 술집 주인이면 듀오에서도 안 받아 준다니?” 웃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작년 10월, 와인 기자이자 강사인 양진원, 와인수입사 출신의 플로리스트 홍지원 씨와 함께 술 마시는 상업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우리는 여지없이 두 가지 편견에 자주 부딪혔다. 하나는 “동업 그거, 결국 싸운다”이고, 또 하나는 “여자끼리 술집 하면 위험하다”였다. 나중에는 그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아예 귀를 접어 놓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4년이 넘도록 두 대표와 함께 와인 모임을 해오면서, 10년이 넘게 ‘GQ KOREA’에서 술과 바에 대한 기사를 써오면서, 한번도 여자라는 게 장애물로 작용한 적은 없었는데 ‘술집’과 ‘여사장’이 같은 선상에 놓이니 이래저래 꼬여드는 ‘K-흰소리’가 많았다. 어떤 컨텐츠로 공간을 꾸려 나갈지에 대해 한창 셋이 모여 이야기하다가도, 어떻게 부모님에게 이걸 이야기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날도 있었다.

계동 ‘라꾸쁘’는 술로 커리어를 쌓은 여자 셋이 모여 만든 바(bar)이자 자율 이용과 대관이 가능한 멀티 플랫폼이다. 일을 하면서 만난 사이인 여자 셋, 아직도 서로 존대말을 하는 여자 셋, 술에 대해서라면 내일 모레까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여자 셋이 만든 공간이다. 와인과 위스키 두 가지 모두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드문 공간이면서, 원데이 클래스와 파티와 같은 술 콘텐츠도 가득 있는곳이다. 세 명의 대표 모두에게 이곳은 경력의 연장선이며 동시에 취미 구현의 장이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여자’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라, 우리는 아예 이를 정면으로 돌파해보자고 생각했다. 샴페인을 담아 마시는 쿠프 글라스(Coupe Glass)는 여신의 가슴을 본 뜬 모양이라느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슴을 상징한다느니, 하는 유래가 있는데 “우리는 가슴 말고도 보여줄 것이 더 많다”는 약간은 반항적인 마음을 섞어 ‘La Coupe’라는 이름을 지었다. 화사하고 컬러풀한 것을 두고 ‘여성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에 반대하지만, 핑크 수트를 입은 파워 우먼이 된 마음으로 바 내부의 색깔을 밝게 통일했다. 지난 10년간 일을 하면서 깨보려고 수없이 노력한 “여자는 단 술을 좋아한다”는 말에도 정면승부를 해보기로 했다. 대표적인 디저트 와인인 포트, 셰리, 마데이라와 같은 주정강화 와인 라인업을 풍성하게 갖추고 이 술의 단맛이 아니라, 양조 특징과 스토리를 전문적으로 손님에게 전달한다. 특히 주정강화 와인은 한번 병을 따면 두고두고 마실 수 있어, 서구권에서는 집에 있는 시간이 긴 ‘할머니의 술’ 혹은 ‘노처녀의 술’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이 차별적인 별명을 “훗” 하는 콧방귀와 함께 열심히 깨보는 중이랄까? 200종의 와인을 갖추면서 특별히 ‘샴페인’은 여성 생산자가 만든 것으로만 들여놓은 것도 우리의 명확한 의도다.

‘라꾸쁘’는 여자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하지만 여자가 마음 편하게 그리고 신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인 것은 확실하다. 실제로 여자 손님 한 명이 방문해 와인 한 병을 천천히 비우는 경우도 많고, 위스키가 ‘남자의 술’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여자 손님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도 자주 만난다. 물론 일을 하면서 ‘중년 남자’에 대해서 인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많은 고민에 빠지게 될때도 있지만, 동시에 술을 즐기는 여자 손님들이 얼마나 적절하고 성숙한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발견하는 바가 많다. 그들은 술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같이 온 지인에게 설명조로 지식을 뽐내지 않고, 모르는 것은 확실하게 모른다고 이야기한 뒤 도움을 청하고, 자신의 취기 상태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새로운 것에 열린 마음으로 과감하게 도전한다. 어느 날, 바 뒷편의 주인과 바에 앉은 손님 모두가 여자로 채워진 날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잔술집을 차리고 싶다던 내 허술한 꿈이 결국 이런 순간을 향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비싸고 좋은 술 한잔을 털어 마셨다. 크아아.


CREDIT 글 | 손기은(프리랜스 에디터, 술 중심의 문화공간 ‘라꾸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