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코믹스 80주년, 그 마케팅이 수상하다

2019.05.20 페이스북 트위터


최근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비롯해 전세계 박스오피스 기록을 휩쓸며 영화 프랜차이즈 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마블스튜디오. 이는 지난 수십 년 간 쌓아온 풍부한 원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성공 신화다. 원작 마블코믹스의 편집부는 올해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예고한 바 있다. 헌데 그 80주년 특집 기획의 마케팅 방법이 상당히 특이하다. 미국 시간 5월 9일 오후 1시경 마블코믹스의 작가들이 일제히 자신의 이름이 적힌 티져 이미지를 업로드한 것이다. 과거 명성을 떨쳤던 최고의 명장들부터 시작하여 현역으로 연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합쳐 무려 백여 명이 동시에 하나의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소식에 팬들은 환호했다. 과연 어떤 작가가 어떤 캐릭터를 맡아 작업할까, 코믹스 커뮤니티는 기대에 들뜬 눈으로 마블코믹스에 시선을 집중했다. 미국 만화에 낯선 한국 독자들에게는 놀랄 법한 일이다. 작가가 백 명이나 된다니, 그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홍보가 된다니.

우리에게 익숙한 일본과 한국의 만화 출판 시스템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은 만화를 쓰고 그리는 작가 본인이다. 만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어시스턴트의 도움을 받고 편집자의 손을 거친다 하더라도 가장 큰 공을 차지하는 것은 원작자가 된다. 작가는 곧 만화의 얼굴이며 만화 캐릭터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귀속된다. 하지만 미국 만화의 출판 시스템은 다르다. '아이언맨', '배트맨' 등과 같은 만화의 저작권은 그것을 쓰고 그리는 작가 본인이 아닌 '마블코믹스', 'DC코믹스'와 같은 출판사에게 있다. 회사가 '아이언맨'과 '배트맨'을 맡아줄 프리랜서 작가들을 일시적으로 고용해 작품을 의뢰하는 방식이다.


미국 만화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엄격하게 분업되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업하여 책을 제작한다. 커버를 그리는 사람(커버아티스트), 스크립트를 쓰는 사람(라이터),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펜슬러), 잉크로 밑그림의 선을 따는 사람(잉커), 색칠하는 사람(컬러리스트), 말풍선을 배치하고 대사를 채우는 사람(레터러) 등이 있다. 똑같은 ‘아이언맨’ 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쓰는 사람과 그리는 사람이 매화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제도 화풍도 다양해지고, 때때로 작가의 조합에 따라 상상치도 못했던 시너지를 발휘하며 전에 없던 ‘명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좋은 작가를 만나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캐릭터라도 일약 스타덤에 올라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출판 제1선에서 맹활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 만화를 즐겨 찾는 독자들은 어떤 작가가 작업했는지를 가장 우선적으로 확인하고 구매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과연 누가 ‘아이언맨’의 본질을 가장 잘 포착했는가, 누가 가장 훌륭한 버전을 그려냈는가에 대한 작가 토론도 코믹스 커뮤니티 내에서는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곤 한다. 그만큼 미국 만화 시장에서는 작가의 이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마블코믹스 80년의 출판 역사를 1년마다 한 페이지씩 각기 다른 작가진을 배당하여 요약해 소개하는 '마블코믹스 #1000' 특별호라는 것이 밝혀졌다. 새로운 시리즈의 연재를 기대했던 팬들에게는 아쉬운 소식이지만, 과거를 돌아보며 갈무리하고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겠다는 편집부의 의지는 확실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번 기획에 참여하는 백여 명 중에 여성 작가는 단 아홉 명에 지나지 않고 유색인종 작가는 그보다도 적다는 사실은, 마블코믹스 출판업계가 백인 남성 위주로 구성돼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지표라며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작가진의 성별·인종 다양성이 확보된다면 더욱 다양한 정체성의 어린이들이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많아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무슬림 여성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십대 무슬림 소녀 ‘카말라 칸’의 폭발적인 성공 사례가 만화 속 다양성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마블코믹스 편집부의 새로운 미래는 이것을 고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겠다.


CREDIT 글 | 권나연(마블코믹스 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