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낙태를 선택할 권리

2019.04.22 페이스북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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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으로 살아가지만 한국 여성에게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최근에는 2019년 4월 11일이 그랬다. 이날 내려진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은 2012년 낙태죄 합헌판결 이후 7년만에 듣게 된 희소식이었다. 사회를 변화하게 만들기에 7년은 그리 충분한 시간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의 세상이 손바닥을 뒤집듯이 정반대로 뒤집히는 일은 7년은커녕 7년 가운데 어느 7분, 혹은 7초 새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한국 여성 개개인이 낙태에 대해 가진 관점이 뒤집히는 섬광 같은 순간은 2015년 페미니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비슷한 시기 동안 서로 다른 시점에 속속 도착했을 것이다. 각자의 세상이 뒤집히는 짧은 순간이 모여 사회 전반의 관점이 뒤집히고 결국은 사회의 판결이 뒤집힌다. 운동의 간단한 원리는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오로지 여성의 관점을 뒤집기 위한 목소리와 뒤집힌 관점을 안은 여성들에게서 터져 나온 목소리가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러나 내가 놀란 지점은 판결 자체가 아니었다. 여성들이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 낸 놀라운 쾌거를 자축하는 것뿐 아니라 이날의 판결이 앞으로의 레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불발탄이 아님을 확인하는 기점일 뿐이라는 데에 대한 합의가 공유되었다는 데 있었다. 축하를 아끼지 않는 동시에 앞으로의 장기전을 대비하며 전의를 다진다는 점, 그리고 이것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승리를 이뤄 낸 주체들 가운데 이미 공유되어 있다는 점. 투지와 비전을 고루 갖춘 동료들의 존재는 장기전이 멀게만 느껴지는 한편 임해볼 만하다고 여기게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여성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싸워야 할까? 작년 한 해 동안 낙태죄 폐지를 위해 출판이라는 수단을 통해 싸운 활동가로서 나는 유럽 5개국의 재생산권 활동가들을 만나고 돌아와 ‘유럽낙태여행’이라는 여행기를 기획하고 출간했다. 그런 만큼 판결을 들은 직후 유럽 각국 활동가들의 고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헌법불합치 판결은 달리 말하면 2020년 12월 31일에 관련 법안 개정안이 발의되기 전까지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낙태죄 폐지와 여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길 사이에 다리를 이을 시간 말이다. 또 달리 말하자면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삶을 나아지게 하지 않는다. 법제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보호나 관리라는 명목에 포섭된 여성의 삶은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임신 주수를 몇 주로 설정하느냐에 초점이 가서는 안 된다. 짧은 주수로 허용되는 낙태는 오히려 해당 주수를 넘어선 낙태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허용 주수가 짧은 낙태 합법 국가의 여성들은 여전히 네덜란드와 같이 허용 주수가 긴 국가로 이동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낙태에 대한 의사의 ‘양심적 거부’ 때문에 여성들이 의료 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렵다. 이탈리아는 의사 10명 가운데 7명이 가톨릭 신자가 아님에도 종교를 이유로 들어 낙태를 거부한다. 피임률이 11%이며 데이트 강간 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에서 원치 않는 섹스를 하지 않을 자유를 확보하지 못하면 낙태 가능성만으로는 몸을 온전히 되찾을 수 없다. 안전이란 미명 하에 특정한 시설에서 낙태를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낙태한 여성에 대한 도덕적 낙인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낙태하는 여성이 처한 끔찍한 환경을 들어 낙태 합법화의 정당성을 호소해서도 안 된다……. 넘어야 할 산은 도저히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높다.

요약하면 싸움의 핵심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제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느냐’다. 그 선택권은 국가가 아닌 여성에게 있다. 낙태죄 폐지가 가지는 상징성은 실제로 출산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우리 몸에 새겨진 낙인을 지워내고 빼앗긴 선택권을 가져오는 데 있다. 더불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오로지 선택권을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보장될 수 없는, 여성이 처한 제각기의 조건에 따라 필요한 제반 여건을 만들어 서로 다른 여성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데 있다. 여성들은 이 싸움이 장기전이라는 것을 이해할 뿐아니라 어디를 향해야 할지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등장할 장애물의 구체적인 모습은 그때 그때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핵심을 알고 있는 한 어떤 장애물이 닥치든 넘을 수 있다. 난항이 예상될지언정 절망적이지 않은 이 싸움을 통해 여성들이 전방위적으로 자신의 몸을 국가로부터 되찾으리라고 믿는다.


CREDIT 글 | 이민경(‘유럽낙태여행’ 기획 및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