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 다섯

2018.12.27 페이스북 트위터
2018년, 여성들의 목소리가 도드라졌던 한 해, 드라마의 여성 캐릭터 역시 변했다. 올 한 해 동안 유의미하거나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여줬던 여성 캐릭터 다섯을 골랐다.



‘미스티’ 고혜란, 직업인으로서의 절실함

JTBC ‘미스티’에서 뉴스나인의 앵커 고혜란(김남주)은 자신의 직업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앵커 오디션을 앞두고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지만 오디션은 한 번뿐”이라며 낙태 수술을 받고,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도 앵커 자리를 지키기 위해 게스트를 섭외하러 달려가는 그의 모습은 절박하다 못해 비인간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김남주가 JTBC ‘뉴스룸’에서의 인터뷰에서 “주인공으로서 대중들한테 어떻게 공감을 이끌어내고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고 밝힐 정도로 고혜란처럼 목표 지향적이고 집요한 여성 캐릭터는 드물다. 그러나 고혜란은 5년 연속 언론인상을 수상하고도 외모 품평과 성희롱에 시달리고, 나이를 이유로 하차를 종용당하거나 같은 여성들으로부터 ‘독하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가 그토록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고혜란은 앵커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후배 한지원이 좋은 아이템을 가져오자 기꺼이 힘을 실어주고, 그토록 원하던 청와대 대변인으로 내정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뒤흔들 수 있는 뉴스를 보도하며 국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뉴스는 진짜였어요.”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사회적 규범을 외면하는 고혜란의 모습은 마치 악처럼 그려지지만, 정작 그가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가치를 일관되게 지키는 아이러니는 여성의 욕망, 더 나아가 직업인으로서의 절실함을 새롭게 바라볼 계기를 제공했다. 다만 남편 강태욱(지진희)와 하명우(임태경)가 그로 인해 파국을 맞고, 모든 갈등 끝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고혜란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다 눈물을 머금는 결말은 결국 지나친 욕망이 불행을 초래한다는 평면적인 주제로 귀결되며 아쉬움을 남겼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윤진아, 로맨스를 통한 성장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서른 다섯의 윤진아(손예진)가 친한 친구의 동생인 서준희(정해인)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며 주목받았다. 하지만 드라마는 윤진아의 달콤한 사랑만을 묘사하지 않는다. 윤진아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친구 이규민(오륭)의 양다리로 이별을 통보받고도 엄마 김미연(길해연)으로부터 다시 만날 것을 종용받거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음으로 회식에서 남자 직원들의 비위를 맞추며 ‘윤탬버린’으로 불리는 모습은 30대 직장 여성이 겪는 삶의 고충을 보여줬다. 재회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음에도 회사나 가게로 찾아오며 집착을 보이는 이규민에게 “난 니가 갖는 물건이 아니야!”라고 외치고, 불이익을 감수하며 사내 성폭력 문제에 총대를 매는 윤진아의 모습은 여성으로서 그의 자각과 성장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현실에 대한 부조리에서 비롯된 윤진아의 성장을 단순히 로맨스의 결과물로서 묘사하기도 한다. 왜 이전과 달리 변했냐고 묻는 공 차장(이화룡)의 질문에 윤진아는 “날 지켜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보며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덜 걱정하게.”라 대답하고, 서준희와의 만남을 반대하는 엄마에게는 “엄마가 모르는데 준희한테 선택받은 거야”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35세의 여성임에도 서준희에게 쉽게 이별을 통보하거나, 심각한 상황에서 라면을 먹자 조르는 미성숙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서준희가 윤진아의 현실에 위안을 주는 무해한 남성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엄연한 성인인 윤진아가 서준희와의 관계에서 ‘작고 귀여운’ 여성으로서 보호가 필요한 대상으로 묘사되거나 서준희와의 이별 이후 사랑 없는 연애를 다시 시작하는 모습은 윤진아의 성장에 의문을 표하게 만들었다.


‘미스 함무라비’ 박차오름, 설치고 행동하는 용기

“박 판사를 보고 있으면 불편해져요.” JTBC ‘미스 함무라비’에서 박차오름(고아라)을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하던 임바른(김명수)의 고백처럼 그를 잘 설명하는 말은 없다. 박차오름은 다리를 벌려 공간을 차지하는 지하철의 ‘쩍벌남’을 똑같은 ‘쩍벌’로 응징하고,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법원에 등장했다가 ‘조신한 옷’으로 갈아입겠다며 니캅을 착용한다. 이처럼 박차오름이 보수적인 조직인 법원에 맞서고 행동하는 모습은 그를 비현실적이거나 감정적인 인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여성들의 성희롱을 체감시키겠다며 정보왕(류덕환)과 임바른을 시장에 데려다 놓고 성희롱을 체험하게 하는 모습을 현실에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부터 꺼내겠다”는 박차오름의 신조는 부장판사 한세상(성동일)으로부터 “처음부터 한쪽 편을 들겠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건 금물”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럼에도 법원 내 소수자인 여성으로서 그가 가진 시선은 때때로 한세상과 임바른이 생각하지 못하는 지점을 짚어내고, 주위의 눈총을 감수하면서까지 법원 조직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보수적이었던 한세상과 임바른을 점차 변화시킨다. 박차오름은 임바른에게 아버지가 없고, 집에는 빚이 많으며, 아픈 어머니를 둔 상황을 털어놓으며 말한다. “그런 주제에 제가 일을 너무 많이 벌이죠? 저도 솔직히 무서워요. 살아남지 못할까봐.” 법원 내 별종처럼 보이던 그조차도 설치고 행동하기까지 큰 용기가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결국 드라마의 끝에서 박차오름의 용기는 “쏟아지는 비를 멈출 수 없다면 함께 맞아야 한다”는 주변인들의 연대로 확대된다. 주변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동반 성장하는 여성 캐릭터로서 박차오름이 유의미했던 이유다.


‘뷰티 인사이드’ 강사라, 여성의 전복된 판타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가 일하는 카페를 통째로 대여하고, 그가 팔아야 할 백화점 가방을 보고 “내가 다 살게요”라고 말하는 여성. JTBC ‘뷰티 인사이드’는 한국 드라마에서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됐던 클리셰를 여성의 몫으로 넘긴다. 티로드항공의 계열사 대표인 강사라(이다희)는 평범한 집의 신부 지망생인 류은호(안재현)를 가사도우미로 고용하며 그와의 마음을 키운다. 돈과 권력을 쥔 여성이 이전까지 연애를 경험한 적 없었던 순수한 남성을 사랑하는 줄거리는 전형적인 로맨스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뒤바꾼 것에 가깝지만,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쾌감을 선사했다. 초기에 의붓오빠 서도재(이민기)의 약점을 잡아내려 고군분투하던 강사라가 류은호에게 여린 속내를 드러내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세계(서현진)의 모친상에서 그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모습은 선함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인물이 나름의 사연을 감추고 있다는 ‘나쁜 남자’의 서사와도 유사하다. 다만 ‘뷰티 인사이드’는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판타지의 전형으로서 강사라를 제시하되, 그가 여성으로서 겪는 현실도 함께 묘사한다. 대표들의 모임 자리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희롱을 당한 강사라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사회적지위를 가진 여성조차 자유롭지 못한 현실의 부조리를 보여줬다. 이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여성인 강사라에게 여성 시청자들이 동질감을 느끼고 이입할 수 있는 요소다. 물론 정혼자의 앞에서 강사라의 신발을 닦아주는 류은호와 “머리는 얘 보라고 했나보다.”라는 말을 쉽게 하는 강사라의 모습은 다소 허술한 개연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조건에 관계없이 원하는 남성을 사랑하는 강사라의 등장은 그간 여성이 가질 수 없었던 영역을 점유하는 새로운 판타지를 제시했다.


‘남자친구’ 차수현, CEO가 되다

결혼 경험이 있는 재벌 여성이 20대 후반의 사회 초년생과 사랑에 빠진다. tvN ‘남자친구’는 그간 드라마에서 숱하게 보였던 설정을 비틀며 화제가 됐다. 동화호텔 대표 차수현(송혜교)은 정치인의 딸이자 태경그룹의 전 며느리로서 신입사원 김진혁(박보검)보다 높은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 그는 위자료로 받은 동화호텔을 경영 위기에서 구해낼 만큼 유능한 여성이지만, 이혼 후에도 태경그룹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영부인을 꿈꾸는 엄마 진미옥(남기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기를 강요받는다. 그로 인해 차수현은 권력을 가진 여성이라기 보다 “사랑이 뭔지 책으로 배웠다”고 말할 만큼 어리숙한 김진혁에게 구원받는 대상이 된다. 속초로 발령받는 김진혁의 위기를 해결하는 건 해외 출장도 미루고 달려오는 차수현이 아니라 발령을 감수하겠다는 김진혁의 결심이고, 차수현의 자유를 위해 진심을 숨기고 이혼했던 전 남편 정우석(장승조) 역시 차수현의 위기를 뒤에서 남몰래 해결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다만 차수현은 김진혁에게 내려진 부당 발령에 분노하며 최진철 이사(박성근)을 불러 경고하고, 진미옥에게 “앞으론 그렇게 안 살 것”이라며 선전포고를 하며 현실에 맞서는 모습을 점차 보여주고 있다. 내년의 그가 기존 여성 캐릭터의 한계에 머무를지, 혹은 주체성을 찾기 위해 변화하는 여성 캐릭터로 변모할지 기대되는 이유다.


CREDIT 글 | 김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