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고 있어요

2018.10.29 페이스북 트위터

©BOSHU

떠올리자마자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선택의 순간, 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즉각적으로.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해두었을 경우 그렇게 된다. ‘여성들과 함께, 여성 코치님께 축구를 배우겠다’ 하고 떠올린 건, 축구 하는 남자들이 얄미워 보인다는 생각을 평소에 차곡차곡 해두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축구선수가 아니어도 축구를 한다. 잘하지 못해도 저들끼리 모여 축구를 하고, 잘하면 잘하는 대로 티를 내가며 축구를 한다. 학교 다닐 때, 운동장은 남자들이 활개 치는 장소였고, 그 애들이 찬 공에 맞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하교하던 내게는 예쁠 리 없는 곳이었다.

그런 운동장에서 여자들끼리 뭔가 하면 어떨까. 교복 치마를 입게 되면서 잘 안 뛰게 된 사람들이랑 달리고, 뛰고, 소리 지르고. 그 뭔가가 무엇일 때 가장 통쾌할까? 남자들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운동, 그건 축구였다. 내가 속한 BOSHU 팀에서는 축구 원데이 클래스를 열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져 축구선수 출신의 여성 감독님을 찾았다. 한 대학에서 여성 축구팀을 이끄는 분이셨다. 완벽해.

풋볼과 축구의 차이를 잘 모를 때라 ‘페미풋볼’이라 이름 지었다. 작년 겨울의 일이었고 페미니즘 강연에서 자주 보던 사람들이 모였다. 미리 맞춰둔 유니폼을 나눠주었고, 사람들이 그렇게 내내 웃는 걸 처음 봤다. 경기에 져도 웃었다. 우리는 경기 중에 하이파이브를 했고, 넘어진 이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우리 팀이 상대 골대 직전까지 갔을 때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반나절 사이 많이 변했다.

공 차는 실력은 별로 안 변했다. 나는 공을 건드리긴 했지만 드리블은 못했다. 패스를 하긴 하는데 상대편한테 하는 식. 다른 팀 선수가 공을 몰고 우리 쪽 골대로 오면 발로 뺏어야 하는데 뇌가 발보다 말이랑 친한지 앞 사람한테 말을 시켜서 공을 뺏으려고 했다. 난 그런 축구를 했다. 그런데, 못해도 좋았다. 가뿐하게 운동복 입고 밤공기를 맡으면서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게 좋았다. 들숨에 풀 냄새를 맡았고 날숨에는 뽀얗게 내 숨이 보였다. 내 몸을 확인하는 일이 이렇게도 가능하구나. 운동 끝나고 몸에 열이 올라 볼이 붉어질 때도 좋고, 땀이 식으면서 몸이 천천히 진정될 때도 좋았다. 사람들이 거칠게 숨 쉬면서 큰 소리로 말하는 게 좋았고, 지쳐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철퍼덕 앉아 있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축구 유니폼 입고 술집 늘어선 대학가 주변을 껄렁껄렁 걷는 것도 좋았고, 남자들이 쳐다보는 것도 좋았다. (이 문장이 성립 가능하다니.)

사람들은 그날 이후, 축구 하던 날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정규 팀을 만들자, 그러자, 다른 일들로 바빠서 잊고 있다가 올해 초 한 지역 대학의 여성주의 연구회에서 함께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번에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 모으는 건 일도 아니었다. 풋살도, 축구도 가능할 만큼 모였다. 페미풋볼 때 가르쳐주셨던 감독님이 또 다른 여성 코치님을 소개해주셨다. 7개월이 지난 지금, 코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한 명 한 명의 특성을 아시고, ‘우리 제자들’이라 부르신다. 내가 아홉 번 이상하게 차고 한 번 제대로 차면 그 한 번에 “나이스!” 하고, 다시 알려 주신다. 학교 체육 수업 때처럼 여자니까 봐주면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선수로 대해주신다.

축구를 배우고 싶지만 조기 축구는 싫었던 여성들에게서 계속 연락이 온다. 대학 때 남자들만 활동하던 축구동아리가 있었고, 그들의 경기는 늘 체육대회의 피날레였다고. 운동회 때 FC우먼스플레잉 팀이 경기한 걸 봤는데, 너무 멋있었다고. 축구를 잘할지 모르겠지만 연락드리겠다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도 못해요. 근데 진짜 재밌어요. 같이 하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모임을 계속 ‘드리블’해나가고, 다른 동네로 ‘패스’하고, 더 많은 곳에 페미니스트 축구 클럽이 만들어질 수 있게 ‘어시’하는 게 BOSHU가 하고 싶은 일이다. 20년 동안 축구를 한 여성 코치님의 ‘단단한’ 몸을 롤모델로 삼고, 가슴이 흔들리는 것보다 가슴이 뛰는 걸 더 느끼고, 시작하기 전에는 동네가 떠나가라 파이팅- 외치고, 골 세리모니를 하고(해본 적 없지만) 골 넣은 사람에게 달려가 안아주고, 그런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 보는 남자들에게 “뭘 봐”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우리에게 모조리 ‘축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FC우먼스플레잉: 대전의 여성 축구팀. 발을 잘 쓰지 못하는 여성들이 모여 여성 코치님께 축구를 배운다. 2018년 2월에 첫 강습을 시작했고 매주 금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운동한다. 첫 기획은 페미니즘 잡지 BOSHU 팀과 카이스트 여성주의 연구회 마고가 함께했으며 지금도 같이 뛰고 있다. 
CREDIT 글 | 서한나(FC우먼스플레잉 팀원, BOSHU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