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의 우아한 세계

2018.07.18 페이스북 트위터


“이래 가 여자들은 안 된다.” 영화 ‘허스토리’는 다른 여성 대표들에게 면박을 주는 문정숙(김희애) 사장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잘한 일을 숨기고 내세우지 않는 데 익숙한 여성들이 좀 더 나서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성공한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가졌지만, 자신이 세운 성공의 기준에서 먼 다른 여성들의 삶에는 정작 무관심하다. 문 사장이 변해가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경험을 가까이서 들으면서부터다. 재판을 진행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피해자들과 함께 일본과 부산을 오가고, 운영하는 여행사가 일본과의 거래에 어려움을 겪어도, 주변에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결코 의지를 접지 않는다. 할 말이 있으면 다 해버리고, 화나는 일이 있으면 바로 목소리를 높이며 욕을 하고, “돈으로 하는 일이 제일 쉽다”고 자신감을 드러내며 끈질기게 재판을 이어나가는 문 사장은 한국 영화에서 좀처럼 다뤄지지 않았던 유형의 나이 든 여성이다.

물론 ‘허스토리’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문정숙은 가상의 캐릭터가 아니라 1992년부터 6년 동안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관부재판의 원고단장을 맡은 김문숙 회장(당시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모델로 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헤어스타일과 커다란 안경을 걸친 외모적 특징은 물론, 다혈질이면서도 박력 있고 정의로운 문정숙의 성격은 대부분 실제 인물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그동안 김희애는 문정숙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여성들을 연기해왔다. 어떤 드라마나 광고에서든 우아한 외모와 태도, 절제된 감정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김희애의 인물들은 JTBC ‘아내의 자격’이나 ‘밀회’처럼 잠깐 방심하거나 흐트러지는 순간을 멜로의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다. 현실의 김희애 역시 자신을 극도로 관리하며 데뷔부터 지금까지 35년 동안 단 한 번도 톱이 아닌 적 없는 배우로 살아왔지만, 그런 그에게조차 남성들만큼의 다양한 역할은 주어지지 않았다. 김희애가 ‘허스토리’에 대해 “안 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뭔가를 해야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연기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지 싶어서 저를 다그치고 더 열심히 하려고 했어요.”(‘조선펍’ 인터뷰) 중압감 때문에 촬영 전 대기실에서 눈물을 흘렸고, 부산 사투리와 일본어를 동시에 익히느라 긴 연기 경력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김희애는 ‘허스토리’와 문정숙을 통해 묻혀서는 안 될 여성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해냈다.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영화와 배우가 하는 일 역시 세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극 중에서 문정숙 사장은 말한다. “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뀌겠지예.” 지금도 김문숙 회장은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서 떠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더라도 한 걸음 더 나아진 인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김희애는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허스토리’ 촬영 후의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하는 일. 그럼으로써 존엄을 지키는 일. 이것이 김희애의 우아함이다.

CREDIT 글 | 황효진(칼럼니스트)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