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젤린 릴리가 ‘앤트맨과 와스프’의 와스프가 되기까지

2018.07.09 페이스북 트위터
‘앤트맨과 와스프’의 호프 반 다인/와스프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에서 제목에 여성 캐릭터 이름이 등장한 첫 작품이다. 그리고 와스프를 연기한 에반젤린 릴리는 단지 기념비적인 캐릭터를 연기했을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데 직간접적으로 일조해온 배우다. 알수록 반하게 되는 에반젤린 릴리의 궤적을 정리해보았다.



광고 모델에서 ‘로스트’ 시리즈의 스타로

에반젤린 릴리가 처음부터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캐나다 서부의 작은 마을에서 자란 그가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던 당시 부업으로 모델 일을 시작한 것도 그저 학비를 벌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도 그는 웨이트리스로, 항공 승무원으로도 일을 했다. 하지만 포드 모델 에이전시와 정식 계약 후 가끔 대사 없는 단역으로 영화나 TV 드라마에 출연했던 그의 인생은 드라마 ‘로스트’ 오디션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주요 배역인 케이트 모에닉을 연기하며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이다. ‘로스트’를 만든 J.J. 에이브람스는 케이트가 미스터리한 캐릭터인 만큼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촬영 2주 전 에반젤린 릴리의 오디션 테이프를 보고 파격적인 캐스팅을 감행했다. 어딘가 신비롭고 섹시한 이미지의 여배우로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지만, 정작 배우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이미지를 부정해오곤 했다. “솔직히 난 미스터리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또한 업계에 있는 여성들은 침착하고 완벽한 사람처럼 보일 것을 요구받는다.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일이 끝나면 코를 팽 풀고 축 늘어져서 잠을 자고 그런다.”(‘롤링스톤즈’)

‘톨킨 월드’에 나타난 여성 캐릭터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숲의 요정이자 레골라스의 동료로 처음 등장했던 엘프 타우리엘은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타우리엘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여성 캐릭터가 없다는 지적에 대한 피드백으로 등장한 영화 오리지널 캐릭터로, 피터 잭슨을 비롯한 작가들은 톨킨의 책에 등장하는 여러 여성 엘프들을 ‘타우리엘’이라는 캐릭터로 통합시켰다. 그리고 피터 잭슨 감독은 배우 도미닉 모나한(‘로스트’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모두 출연했다)을 통해 자선 활동 및 결혼과 출산으로 잠시 연예계 활동 중단을 선언했던 에반젤린 릴리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엘프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 액션도 잘 소화하기에 적합한 배우였다. 어려서부터 톨킨의 책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합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던 그는, 타우리엘이 ‘호빗’ 시리즈에 필요했던 배경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했다. “사실 원작 책은 정말 남성 중심적이지 않나. 전부 남성 캐릭터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보기가 힘들다. 우리에게는 테스토스테론이 가득한 영화로부터 일종의 휴식이 필요하다.”(‘콜라이더’)

남성을 따라 하지 않는, 와스프의 우아한 액션
‘호빗’ 시리즈에 이어 MCU의 선택까지 받았지만, 처음부터 에반젤린 릴리에게 수트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앤트맨’의 호프 반 다인으로 캐스팅된 그가 제대로 수트를 입을 수 있는 조건은 솔로 무비의 흥행이었다. 다행히 1억 3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전 세계 5억 불 이상의 수익을 올린 ‘앤트맨’은 안정적으로 속편 제작에 착수하게 됐다. 타이틀롤에 등장해 앤트맨과 대등하게 활약하는 와스프의 캐릭터는 에반젤린 릴리의 적극적인 의견, 그리고 감독의 수용으로 만들어졌다. “와스프가 너무 무거운 인물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난 그가 소년들을 꾸짖는 엄마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많은 여성들이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그런 식으로 묘사되어 왔다. 난 호프가 남자들 무리 안에서도 스스로를 다룰 수 있는 현대적인 여성이 되기를 바랐다. 유머 감각이 있고, 가벼운 조크에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스크린랜트’) 또한 ‘앤트맨’ 당시 무에타이와 AFC 스타일의 싸움을 공부했던 그는 액션 스타일의 변화도 주장했다. “명백하게 남성적인 액션이었다. 내 몸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어려웠다. 여성의 힘은 폭력적인 남성을 포용하거나 모방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앤트맨과 와스프’에서는 액션의 스타일을 많이 바꾸고 싶었다.”(‘할리우드 리포터’) 와스프의 액션이 전편보다 우아하고 품격 있게 설계된 것은, 에반젤린 릴리가 어렸을 때 사랑했던 여성 캐릭터의 모습을 직접 반영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꾸밈 노동에 대해서
남성과 여성이 같은 수트를 입고 동등하게 활약하는 ‘앤트맨’ 같은 작품이 만들어지면서, 여성의 꾸밈 노동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생겼다. 에반젤린 릴리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마블의 슈퍼히어로를 연기한 배우들이 의상을 입기 불편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와스프의 수트를 입고 불편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괜찮은데? 설마 MCU에서 내 의상이 가장 편한 건가? 아니면 남자들은 멋있어 보이기 위해 하이힐을 신는 것 같은 불편함을 감수한 적이 없는 건가? 남자들은 내가 왜 이렇게 불편한 것을 입어야겠냐며 투덜거리겠지만, 여자들에게는 이것이 일상이다. 항상 불편한 상태로 있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여성이 매일 감당하는 코르셋이 슈퍼히어로 복장보다도 더 답답하다는, 정곡을 찌르는 발언이었다.

자신의 콘텐츠를 만드는 창작자
잠시 연예계를 떠나기도 했던 에반젤린 릴리에게 배우는 단 하나의 평생 직업이 아니다. 배우 일만큼이나 글쓰기가 중요하고, 둘 모두 자신의 직업이라고 말하는 그는 실제로 어린이책 시리즈를 직접 출간하기도 했다. 또한 그간 배우로서 활동하며 관계를 맺었던 업계인들과 함께 TV 프로그램 및 영화 제작도 논의 중이라고. “내가 내 나이에, 지금 갖고 있는 커리어 안에서 이렇게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나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난 공상을 좋아하던 어린 소녀였고, 지금도 항상 마음속 상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할리우드 리포터’) 특히 남성 중심적으로 흘러가던 SF와 판타지 세계에서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고, 결혼 및 출산 이후에도 멋진 커리어를 이어온 그가 직접 만든 작품들을 머지않은 미래에 볼 수 있기를.
CREDIT 글 | 임수연 (‘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