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코믹스 편집자가 되돌아보는 마블 영화의 10년

2018.04.30 페이스북 트위터


2008년 앨런 무어의 ‘왓치맨’을 시작으로, 그리고 이듬해 ‘시빌 워’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DC와 마블의 다양한 코믹스를 한국 시장에 선보였다. 누구나 알 법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아는 이가 드물 것 같은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 혹은 슈퍼 히어로라 분류될 만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 등장하는 오리지널 스토리에 이르기까지 ‘훌륭하다’, 혹은 ‘괜찮다’는 평가를 받는 책들을 두루 만져보았다. 초반 몇 년 동안은 소수의 마니아들을 제외하면 찾는 이 없었던 분야의 상품을 처음으로 판매하며 느낀 설렘과 뿌듯함이 개척자가 겪기 마련인 온갖 실패로 상쇄된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마블 스튜디오의 10년을 정리하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한국에서도 큰 화제를 모으며 개봉한 지금, 이 분야를 업으로 삼아 1만 시간을 세 번 보냈다는 사실에 꽤 의기양양하고 있다. ‘시빌 워’를 출간할 당시만 해도 이 작품이 영화화되어 전 세계적으로 그토록 큰 인기를 얻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만화 편집자로 일하고 있지만 영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장르이다 보니 개봉되는 히어로 영화를 보는 시선도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마블과 DC의 영화 행보를 보노라면 생뚱맞게도 인생과 관련한 경구들이 떠오른다. ‘인생무상’, ‘인생한방’, ‘인생은 타이밍’…. 처음 미국 만화를 기획할 당시만 해도 DC 영화는 거의 완성된 느낌으로 승승장구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시리즈와 잭 스나이더 감독의 ‘왓치맨’이 세련되고 성인 취향의 결과물을 내놓으면서 대중 모두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기세를 올렸다. 반면 마블은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인크레더블 헐크’, ‘토르: 천둥의 신’, ‘퍼스트 어벤져’, ‘어벤져스’ 등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시종일관 가볍고 연한 감성을 어필했는데, 이는 DC의 진중한 분위기를 의식해 의도적으로 잡은 방향성이 분명해 보였다. 원숙함에 대항하는 발랄함이랄까? 그래서인지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소개될 당시, 그러니까 페이즈 1까지만 해도 마블 영화에 대한 개인적 감상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감각은 인정할 만하지만 조금은 단조롭고, 마음을 울리는 묵직한 한 방이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페이즈 2에 들어서자 마블 영화는 완성도가 급격히 올라가더니 DC뿐 아니라 다른 어떤 블록버스터도 그 수준까지는 끌어내지 못할 기대감을 품게 하는 결과물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믿고 보는 마블 영화 시대의 개막이었다. 특히 감탄한 것은 영상화 과정에서 원작의 설정을 쳐내거나 추가하거나 변형시키는 정도가 더없이 적절한 수위였다는 점,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의 영화 내 지분과 관련한 황금 밸런스였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탑 3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시기에 나온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앤트맨’을 고른다. 세 작품 모두 국내에서 인지도나 인기 측면에서 물음표가 붙는 상황이었는데, 이 작품들을 보고 나서 당분간 마블은 누구도 막을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의 경우 페이즈 1에서는 원제가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였다. 주인공인 ‘캡틴 아메리카’를 빼고 그가 어벤져스의 멤버임을 강조한 제목이었다. 그런 캡틴 아메리카가 페이즈 2에서는 단독 영화로 상당한 성공을 거뒀으니, 그 자체로 마블의 약진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마블은 한때 경영 위기로 스파이더맨과 엑스맨 등 알짜 캐릭터를 여기저기 팔아넘기며 간신히 살아남았었다. 하지만 이후 케빈 파이기라는 걸출한 수장을 주축으로 뚝심 있게 프로젝트를 추진하더니 단 한 차례의 삐끗함도 없이 차곡차곡 성공을 적립하면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 이르러서는 온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이렇듯 위치가 완전히 뒤바뀐 두 회사의 현재를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사이 DC는 야심 차게 선보인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이 실패한 뒤 좀처럼 예전의 분위기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미국 만화의 양대 산맥이라 일컬어지는 두 회사는 자신들의 역사 속에서 줄곧 엎치락뒤치락을 되풀이해왔다. 마블의 태평성대가, DC의 ‘흑역사’ 같은 현재가 영원히 이어질 리 만무하다. DC와 마블 코믹스를 모두 다루면서 두 회사 각각의 색깔과 장단점을 익히 알고 있는 입장에서, 원작으로만 따진다면 어느 한쪽방적으로 다른 한쪽에 압도당할 만큼, 압도할 만큼의 우열은 없어 보인다. 그저 취향의 차이일 뿐. 그러니치열한 랠리를 관전하는 이들이 준비해야 할 것은 팝콘, 그리고 온전히 즐기려는 느긋한 마음뿐. 좀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싶다면 응원팀을 고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시빌 워’ 출간 당시 홍보를 위해 내세운 카피 한 줄이 문득 떠오른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CREDIT 글 | 백소용 (마블/DC 코믹스 한국 편집자)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