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추천│② 세상을 살아가는데 알아야할 여자의 이야기들

2018.04.10 페이스북 트위터
세상의 절반이 만든, 그리고 세상의 절반의 생각과 이야기와 감정들이 담긴 작품들의 일부를 ‘ize’가 추천한다. 여자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또는 남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알고 느껴야할 것들.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 나오는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들을 좋아한다. 고전을 볼 때는 아무래도 여성 캐릭터를 그리는 낡은 방식을 ‘감안하고’ 볼 때가 많은데, 그의 영화는 요즘 작품보다도 진취적일 때가 있다. 일찍이 많은 페미니스트 영화 이론가들이 엄청난 속사포 대사로 남성을 ‘이겨먹는’ 그의 여성 캐릭터, 이른바 ‘Hawksian woman’을 따로 분석하기도 했다. ‘그의 연인 프라이데이’(1940)는 주인공 직업이 (나와 같은) ‘기자’인데다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있어 틈나는 대로 주변에 추천하는 마스터피스다. 모닝 포스트의 유능한 기자 힐디(로사린드 러셀)은 전 남편이자 편집장인 월터(캐리 그랜트)와 이혼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참이다. 회사를 그만두고 뉴어크 시 알바니에 사는 남자와 재혼해서 주부로서 아기를 키우며 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특종을 잡을 기회가 오자 월터는 가장 유능한 힐디에게 기사를 맡기고 싶어 한다.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하던 힐디는 결국 기자 본능이 되살아나 기사 쓰기에 돌입하고, 결혼은 친구와의 약속을 펑크 내는 것보다도 가볍게 버려버린다! 약혼자가 지금 따라오지 않으면 파혼이라고 화를 내도 기사 쓰는데 집중하느라 쳐다보지도 않고 “날 원하면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 난 시골 아줌마가 아니라 신문사 기자”라며 자신의 선택을 확고히 한다. 하워드 혹스의 ‘베이비 길들이기’(1938) 역시 캐서린 햅번이 결혼을 앞둔 캐리 그랜트(또!)를 거의 갖고 놀다가 결국 자신이 쟁취하는 흥미로운 스크류볼 코미디 걸작이다. 자신은 결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남성 창작자인 하워드 혹스가 남긴 이 말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의미를 던져준다. “나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여성이 정말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임수연 (‘씨네21’ 기자)


‘생리공감’

“이 피로 태어난 모든 이에게”
남성이 왜 굳이 여성의 생리를 알아야 하는가. 장담컨대 여성의 생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10분 안에 여자 유혹하는 법’ 같은 허황된 팁보다 당신의 인생에 훨씬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여성의 생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여성의 몸과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여성이 첫 생리를 시작하면 격렬한 환대와 축하를 받지만, 동시에 생리하는 여성으로서의 삶은 지워진다. 이제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생식능력을 갖추었으니 ‘진짜’ 여성이 되었다는 이상한 축하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생리는 부끄럽고 더럽고 불결하니 감추고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모순된 억압이다. ‘생리 공감’은 여성조차 언급하기를 꺼려했던 ‘생리’에 대해 탐구하고 이야기하는 책이다. 폐경이 오기 전까지, 생리하는 여성은 인생의 4분의 1을 피를 흘리고 생리통에 시달리며 생리전증후군(PMS)에 고통받곤 한다. 실재하는 고통과 일상적인 삶을 전 지구의 절반이 경험하고 있는데도 사회는 언제나 그것을 외면하고 조롱하고 모른 척했다. ‘생리 공감’의 저자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일들에 대해 “이것이 인간의 일이며, 인생의 일부”라는 의미에서 “인류 절반의 경험과 기억이 아닌 인류 전체의 유산, 공동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은 ‘듣는 것’이다. 여성들의 몸이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남성이라면 “생리를 참았다가 싸라(?)”는 망언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정유민(프리랜스 에디터)


‘젊은 여자’

김사월은 ‘젊은 여자’가 실린 자신의 첫 솔로 앨범 ‘수잔’의 소개글에 이런 문장을 썼다. “‘수잔’은 그녀 개인이 삶에서 맞서온 시간을 수잔이라는 하나의 인물로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기획되었다.” 지나온, 살아온이 아닌 ‘맞서온’이라는 표현이 익숙한 사람들은 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맞서온 시간들이 여자들의 삶에 어떤 흔적들을 남겼는지 말이다. 늦은 밤 컴퓨터로 보는 보는 춤추는 여자 아이돌의 모습과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자옷을 구경하는 20대 여성 수잔의 모습이 교차되는 노래는 그 안에서 정작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아무것도 입을 수 없는 자신의 속내를 찾아 끄집어 낸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야 하는 젊은 여자의 시절”은 쉽게 여자들이 가장 행복한, 대우 받는, 권력을 가진 시기로 언급되지만 과연 그 시기를 실제로 아무 죄책감 없이 넘치게 즐기고 탐하는 이는 누구인가. 관성적으로 자리하고 있던 주체와 객체가 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수잔은 부쩍 자랐다. 김사월은 2년 뒤 발표한 신곡 ‘달아’에서 ‘슬픈 생각이 지겨워 / 사랑하는 미움을 멈추고 싶어’라 노래한다. 간절히 꿈꾸던, 세상의 모든 것이 ‘슬프고 두렵지 않은 때’를 아직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여자의 걸음은 적어도 여기까지는 도달해 있다. 그를 바라보는 당신들의 걸음은 지금 어디쯤 놓여 있는가.
글. 김윤하(음악평론가)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로맨틱 코미디의 세계에서, 사랑에 빠진 여자 주인공의 행동들은 종종 낭만적이지만 비이성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마치 여자는 사랑에 빠지면 이성과 논리가 완전히 마비되는 존재라는 듯이.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는 코미디 시리즈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는 미디어에서 흔히 그려지는 "사랑에 빠진 여자"의 이미지를 영리하게 비틀어 그 자리에 정말로 이성과 논리에 의해 통제가 안 되는 심리적 문제를 가진 여자 주인공을 집어 넣는다. 이와 더불어 로맨틱 코미디 장르와 팝 컬쳐 전반의 다양한 요소를 패러디한 재기 넘치는 음악들로 3개의 시즌을 알차게 채우고 있는 이 뮤지컬 코미디 쇼는 주인공 레베카가 운명적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면의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지난한 고군분투의 과정을 다크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유머와 함께 꿋꿋이 그려낸다. 레베카가 경험하는 기쁨, 슬픔, 우울, 절망, 매혹, 혼란, 집착, 광기 등의 생동감 넘치는 감정들을 다양한 장르의 뮤지컬 넘버와 함께 생생히 그려내는 이 페미니스트 코미디 쇼를 감상하고 나면 지금까지 미디어를 통해서 봐 왔던 "여자"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단편적인 것에 불과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글. 김경은(‘페미니스트 코미디 클럽’ 운영자)


‘쇼코의 미소

최은영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문학동네, 2016)는 한국소설사상 가장 강렬하게 ‘여자들의 세계’를 묘사한 문제작 중 하나다. 스스로를 “1세계 백인 남성이 아니고 미국, 영국, 네덜란드 사람도 아닌, 21세기 한국의 1980년대생 여성”이라고 말하는 이 작가는 ‘여성’을 초역사적・초국가적 존재로 다루지 않았다. 최은영의 여자들은 베트남전쟁과 인혁당사건을 거쳐, ‘알파걸’ 또는 ‘세월호키드’로 불리며 당대를 산 ‘역사적 존재’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은 시공간을 망라하며 존재해온 ‘여자들의 세계’를 웅장하리만큼 전면화해 묘사한다. 작가는 모녀・조손・선후배・이웃・친구・연인 등 온갖 형태의 여성관계, 우정과 사랑, 존경과 흠모, 연민과 질투, 배려와 자애 등 그 관계에서 가능한 거의 모든 정신적이고 성애적인 감정을 자신의 강력한 문학적 자원으로 삼았다. 최근 공세적으로 남성젠더화한 대중서사의 지배적 경향을 감안한다면, 오직 ‘여자들의 세계’에서 성장하고 좌절하는 여자들을 포착하는 최은영의 기획은 분명 ‘반역적’이다.
아쉬운 것은, 최은영의 여자들 중 누구도 충분히 더럽거나 비열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성이 정치적 올바름에 구속되지 않고 “난봉꾼, 무법자, 반란군” 역할을 기꺼이 맡을 때 비로소 ‘플롯은 남성의 것’이라는 명제를 뒤집을 수 있다는 리타 펠스키의 말을 떠올린다면, 최은영이 묘사한 ‘여자들의 세계’는 아직까지 평화롭고 성찰적이다. 하지만 다시 펠스키를 빌어 말한다면, 모든 ‘여자들의 세계’가 꼭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같을 필요가 없다는 말 또한 참이겠다.
글. 오혜진(문화연구자)
CREDIT 글 | 임수연, 정유민, 김윤하, 김경은, 오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