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추천│① 세상을 살아가는데 알아야할 여자의 이야기들

2018.04.10 페이스북 트위터
세상의 절반이 만든, 그리고 세상의 절반의 생각과 이야기와 감정들이 담긴 작품들의 일부를 ‘ize’가 추천한다. 여자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또는 남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알고 느껴야할 것들.



넷플릭스 ‘글로리아 올레드: 약자 편에 서다’

“독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남자들은 그에 대해 말한다. 유명 방송인 지미 키멜은 ‘악마와 한 편인 그 여자’라고 부른다. 매스컴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그를 향해 시끄럽고 자의식 강하고 유명해지려 방송에 나온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많다. 여기서 질문 하나, “그런 남자를 본 적 없나요?” 남들이 뭐라 하든, 글로리아 올레드는 싸운다. 여자아이용과 남자아이용 장난감을 나눠 진열한 잡화점을 고소하고, TV쇼에서 논쟁하고, 빌 코스비가 약물 강간을 했던 여성들을 돕고, 도널드 트럼프가 성추행한 여성의 편에 선다. “이들(피해자)의 주장이 100% 진실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따위의 질문을 받고, 소송의 역풍을 맞기도 하고, 합의금을 노린다며 조롱당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피해자가 생존자로 진화하고 마침내 투사가 될 수 있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배운 여성은 알고 있다. “여성을 대변하는 건 그 자체로 여성에게 힘을 싣는 경험이에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여성들의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사라지고 피로와 패배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반세기에 걸쳐 최전선에서 싸워온 백전노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와 #미투(#metoo) 운동의 시대를 함께 맞이하여 선언한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죠.”
글. 최지은


‘에이미와 이저벨’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여성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세상의 많은 딸은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어머니의 인생을 좋아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딸에게 밝히지 못하는 사랑을 마음에 품고 있는 어머니 이저벨과 ‘다른 엄마’를 바라는 마음을 비밀로 가진 딸 에이미의 이야기다. 서로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이야기가 없어서 딸과 어머니가 자주 갈등관계에 놓인다는 생각을 해온 사람이라면 ‘에이미와 이저벨’은 모녀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비밀을 만들고 감추는지를, 원한 것 이상으로 자신을 닮은 이로부터 느끼는 배신감이 어떻게 자기 삶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자신이 누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삶에 대한 기대를 딸에게 투사한다. 딸은 어머니를 이해할수록 어머니의 삶이 자신의 미래가 될 가능성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싱글맘과 그 딸, 두 사람뿐인 가족을 통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여성의 마음속 가장 뜨겁고도 황폐한 풍경을 글로 표현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진심을 숨기는 법을 한평생 훈련한다는 것, 아마도 여성의 삶의 가장 비밀스런 단면. 딸과 어머니처럼 “전쟁 같은 사랑”을 하는 인연은 없다.
이다혜(북칼럼니스트, ‘씨네21’ 기자)


‘해피 어게인’

‘해피 어게인’에는 한국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유형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엄마를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 아빠 때문에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전학 온 웨스(조쉬 위긴스). 상황이 괴롭다고 해서 세상 혼자 사는 사람처럼 무게 잡거나 늘 화가 나 있거나 자기연민에 빠져 있지는 않다. 불어 우등생인 웨스는 불어 교사의 부탁으로 레이시(오데야 러쉬)와 함께 숙제를 하게 되는데, 레이시는 학교에서 ‘헤프다’고 소문난 아이다. 하지만 웨스는 소문에 딱히 영향받지 않는다. 레이시의 방으로 들어간 웨스. 어색한 마음에 말을 붙여보는데 친한 척하지 말고 그냥 숙제나 하자는 레이시의 말에 바로 입을 다문다. 무리하게 친해지려 하지도 않고, 바싹 다가앉지도 않는다. 무례하게 방을 둘러보지도 않는다. 훗날 레이시의 어두운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도 침묵한다. 레이시가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남의 인생에 쉽게 참견하고 훈계하거나, 누군가를 구원하겠다며 섣불리 덤벼드는 소모적 광경을 목격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웨스 때문에 소문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웨스와 레이시가 서로 좋아하게 되었을 때 둘은 키스를 하다가 멈춘다. 레이시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관습에 길들여진 관객이 오히려 당황할 포인트다. 웨스는 살짝 서운해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밀당’으로 착각한다거나 로맨틱함을 가장한 폭력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웨스는 자주 레이시를 그냥 내버려둔다. 레이시가 무서워서도 아니고, 자길 알아봐 달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저 가장 상식적인 형태의 존중이다.
김현민(영화 저널리스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2012년 테드X유스턴 강연에서 페미니즘을 고른 것은 비록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닐지언정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중의 기립박수에 그는 희망을 보았고 강연은 책으로 엮어졌다. 남자를 싫어하고, 늘 화가 나 있고, 화장을 안 하고, 사랑받지 못해 불행한 여자. 아디치에가 페미니스트에 대해 들어온 말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식하고 상스러운 사람들뿐 아니라 똑똑하고 상냥하며 진보적인 남자들까지 이런 소리를 하는 점이었다. “인권옹호자면 충분하지 왜 굳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옛날이면 몰라도 요즘은 여자가 딱히 남자보다 힘든 세상은 아니잖아요?”, “그냥 개인의 문제지 사사건건 남녀 문제로 환원할 필요가 있나요?” 나이지리아든 한국이든 남자들이 던지는 비슷한 질문에 그는 화를 내는 대신 다정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절충주의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상냥하게 답하되 질문자의 눈치를 보지는 않는다. 얼핏 도발적인 제목은 사실 꽤나 온건하다.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남성들까지 포함한 우리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그는 자신이 아는 가장 훌륭한 페미니스트로 남동생을 꼽기도 했다. 페미니즘에 막 관심을 가진 남성에게 이 책은 가장 무난한 출발점이다. 처음부터 가장 완벽한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은지(번역가)


‘Me and A Gun’ 

넷플릭스 ‘판타스틱 하이스쿨’에서 토리 에이모스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성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던 케이트(페이튼 케네디)는 어느 날 문득 방 한쪽에 붙어 있던 남자 연예인의 포스터를 떼어버리고 토리 에이모스의 사진을 붙인다. 레즈비언 커플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이 모인 토리 에이모스의 콘서트에서, 케이트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토리 에이모스는 그런 뮤지션이다. 1988년 데뷔한 후 중년의 나이에 이른 지금까지 활동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여성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를 노래하며 다른 여성들에게 힘을 준다. 대표곡 중 하나인 ‘Me and A Gun’에서 그는 스물한 살 때 자신의 팬인 남성으로부터 겪은 성폭력을 고백했다. 비슷한 기억을 가진 여성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냈으며, 이후 토리 에이모스는 ‘Past the Mission’이라는 곡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고통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로 살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토리 에이모스와 수십 명의 여성들은 계속해서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간다. 굳은 표정의 남성들이 길을 막고 늘어서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각자의 경험을 말하고 또 들으며 지금, 한국의 여성들이 하고 있는 일도 아마 이 뮤직비디오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 황효진(칼럼니스트)
CREDIT 글 | 최지은, 이다혜, 김현민, 정은지, 황효진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