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너원, 서사의 명과 암

2018.03.26 페이스북 트위터


서사의 힘은 강하다. 세상에 기승전결이 제대로 갖춰진 몰입도 높은 이야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여기에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한 겹 덧씌워진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상황, 이야기를 너무 사랑해 뉴스에도 예능에도 모조리 끼얹어버리는 한국의 특성까지 더해진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보이 그룹 워너원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미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고 출발했다. 이들을 탄생시킨 엠넷 ‘프로듀스 101’은 아이돌 연습생들의 데뷔를 향한 간절함과 절실함, 그를 둘러싼 측은지심을 동력으로 삼은 프로그램이었고 이는 살아 있는 서사의 끝판왕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리얼’이라는 게 유효했다. 앞서 수 많은 아이돌 그룹이 다양한 기획을 통해 자신만의 서사를 쌓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건 그것이 대부분 방송국이나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금세 들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워너원의 서사는 달랐다. 이들의 흘린 피땀눈물과 희노애락은 서바이벌이라는 프로그램 형식을 통해 적나라할 정도로 그대로 대중에게 전달되거나 전달된 것처럼 교묘히 연출되었다.

이렇듯 기가 막히게 먹혀 들어간 서사에서 태어난 그룹이 그를 앨범에 녹여내지 않는 것도 직무유기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나, 당신의 선택에 의해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나를 0으로, 덕분에 비로소 태어난 나, 그래서 하나 된 우리를 1로 두고 태어난 각종 방정식은 그대로 앨범 타이틀이 되었다. 1x1=1, 1-1=0, 0+1=1. 이 숫자들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모른다면 도무지 짐작도 불가능한 이 수식이 가지는 의미는 그대로 워너원의 앨범이 가지는 가장 큰 가치가 되었다. 그리고 워너원 앨범이 갖는 한계 역시 모두 그곳으로부터 시작된다.

워너원의 세 번째 앨범 ‘0+1=1 (I PROMISE YOU)’는 인생의 정점을 칭하는 ‘골든 에이지(Golden Age)’를 앞세운다. 지금, 우리 생애 가장 빛나는 시기. 틀린 말은 아니다. 타고난 화제성은 물론 음반 판매량, 음원 차트 등 워너원은 지표와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가요계 모든 기록에서 갓 데뷔한 그룹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수치를 기록하며 승승장구 하고 있었다. 이를 유일하게 따르지 못하는 건 단 하나, 이들의 음악이다.

새 노래 ‘Boonerang(부메랑)’은 데뷔 당시 미처 타이틀곡으로 선택되지 못했던 ‘활활’을 기리기 위해 준비된 일종의 한풀이처럼 느껴진다. 최근 1, 2년 간 케이팝 신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트랩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EDM 트랙 계열로 무엇보다 퍼포먼스를 받쳐주는데 최적화된 곡이다. 그러나 이외의 큰 특징은 없다. 도입부의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포인트로 상쾌하게 뽑아낸 댄스팝 ‘GOLD’도, 앨범 발매 전 선공개 되며 큰 주목을 받았던 ‘약속해요(I.P.U.)’도, 아련한 감상을 담은 팝 발라드 넘버 ‘너의 이름을’도 싱글로서 특별하거나 매력적인 부분을 선뜻 꼽기 어렵다. 마치 ‘케이팝 샘플러 A to Z’에서 적당히 골라낸 샘플들을 하나의 곡으로 확장시킨 듯한 노래들은 크게 나쁘지도 않지만 크게 좋지도 않다. 한 마디로 ‘워너원이기에’ 지금의 주목이 가능했던 곡들이다.

‘워너원이니까 된다’는 말은 ‘워너원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의미를 동시에 품는다. 두 번 물을 것도 없이 명확한 것은 이 그룹의 출신과 앨범에 적힌 기초적인 수식뿐, 그 안에 담긴 음악은 그 자체만으로는 워너원이라는 그룹에 대해 그 무엇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하다못해 ‘선뻗기’ 밖에 모르던 병아리 연습생에서 데뷔조로 순식간에 신분이 바뀐 멤버들의 눈에 띄는 성장이나 프로그램을 통해 두 번째 데뷔를 훌륭히 이뤄낸 멤버들의 높은 능력치 등 준비된 강점을 부각시키는 데에도 한 없이 나태하기만 하다. 세상 둘도 없을 기회를 잡아 남들보다 한참을 앞서 시작했지만 그 시작점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서사. 이 이야기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마냥 달콤하기만 한 해피 엔딩만은 아닐 것 같다.
CREDIT 글 |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