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가 여성 앵커의 패션을 해석하는 법

2018.03.02 페이스북 트위터


김남주는 20년 넘게 도회적 세련미의 대명사였다. SBS ‘도시남녀’부터 MBC ‘그 여자네 집’과 ‘내조의 여왕’을 거쳐 KBS ‘넝쿨째 굴러온 당신’까지, 헤어·메이크업·스타일링을 통째로 베끼고 싶은 전문직·사무직 여성들의 워너비. 복귀할 때마다 경력에 부응하는 연기력과 패셔너블함을 동시에 요구받는 배우. 그리고 김남주는 JTBC ‘미스티’로 비주얼적인 면에서 대중의 기대 심리를 200% 만족시켰다. 고혜란(김남주)의 세련되면서도 우아하고,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한 스타일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고혜란은 ‘뉴스 9’을 진행할 때 화이트·그레이·블랙·베이비블루·아이보리·브라운처럼 튀지 않는 색상에 전통적인 디자인의 정장을 입는다. 네이비 스트라이프 수트에 레드 블라우스, 레드 수트에 화이트 블라우스를 입었던 1~2회가 예외로 보일 정도다. 활처럼 아찔한 곡선을 그리는 고가의 브로치로 포인트를 줬지만 화이트 셔츠에 블랙 재킷·베스트·스커트 조합은 완고하고 노련해 보였다. 레드 스트랩이 달린 시계, 재킷 밖으로 접어 올린 셔츠 소매가 돋보였지만 화이트 셔츠에 베이비블루 색상의 더블 브레스티드 수트 또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추문을 당당하게 해명했던 방송에서도 깔끔하게 화이트 수트에 라운드넥 블랙 블라우스만 입었다. 미니멀리즘의 극치다.

출·퇴근용 복장도 빈틈없기는 마찬가지다. 납작한 칼라가 달린 화이트 실크 블라우스는 단추를 3개 풀어 쇄골이 확실하게 보이도록 한다. 여기에 검은색 윗단으로 허리선이 더욱 잘록해 보이는 베이비블루 펜슬스커트를 입어 매끈하게 라인을 뽑는다. 블랙 터틀넥에 와이드핏 그레이 체크패턴 수트를 입은 뒤 얇은 벨트로 허리선을 잡아주기도 한다. 밋밋한 원버튼 그레이 재킷은 같은 색상의 와이드 팬츠와 도트 패턴에 레이스 디테일이 달린 블라우스를 더해 멋진 수트룩으로 탈바꿈한다. 고혜란은 사무직 여성들의 옷장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아이템을 남다르게 표현할 줄 아는, 주도면밀한 능력자다. 부부 동반 모임에서 입었던 생로랑의 블랙 벨벳 미니 드레스, 돌체앤가바나의 플라워 패턴 오프숄더 원피스 등 사복 패션의 화려함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고혜란은 잔뜩 힘 준 옷 대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실루엣으로 강인함을 표현할 줄 아는 내공의 소유자다.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단발 웨이브 펌과 풀메이크업을 고수하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현재 KBS·MBC·SBS·JTBC 같은 주요 방송사의 여성 앵커들은 엇비슷한 옷을 입고 메인 뉴스를 진행하는 편이다. 보는 사람의 숨까지 막힐 정도로 딱 달라붙는 원버튼 재킷에 움직일 때마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는 미니 원피스, 또는 갑옷 같은 투버튼 재킷에 하늘하늘한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착 붙는 스커트를 입는다. MBC ‘뉴스데스크’의 손정은 아나운서, JTBC 주말 ‘뉴스룸’의 이지은 기자 등 일부 앵커들이 간헐적으로 수트를 입긴 하지만 대부분 명치를 조이는 재킷에 코르셋 같은 치마 정장을 입는다. 주요 방송사들은 그렇게 ‘단정하고 단아하며 우아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사실상 규격화된 복장만 동원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아무리 와이드핏이 유행해도 뉴스의 세계에서는 울트라 슬림핏만 허용된다. ‘고혜란 룩’은 이 기묘한 전형성에 작은 균열을 냈다. 잘 빠진 바지 정장이 치마 정장을 압도한다는 사실 말이다.

다만 고혜란은 현실의 앵커들보다 더, 더, 더 말랐다. 못 믿겠다면 당장 S사이즈 원버튼 재킷을 입은 주요 방송사 여성 앵커 중 아무나 골라 고혜란과 비교해보라. 상체를 사정없이 죄어 오는 그 잔인한 재킷을 고혜란처럼 낙낙하게 소화한 앵커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고혜란은 수많은 앵커들의 몸에 슈퍼히어로 코스튬처럼 착 들러붙은 아이템을 ‘살짝 루즈하게 걸치듯’ 소화하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김남주는 지난 1월 27일 ‘미스티’ 사전 스페셜 방송에서 촬영 전 5kg 감량 사실을 밝혔다. 연예인도, 현직 앵커들도 따로 추가 다이어트를 해야 만들 수 있는 핏, 그게 고혜란의 수트핏이다. 여성 직장인들은 가뜩이나 꾸밈노동에 내몰려 있다. 그런 상황에서 판타지에 가까운 특정 핏 때문에 체중 관리에 강박을 느끼거나 할 필요는 없다. 고혜란 룩의 필수 요건은 김남주의 몸이 아니다. 전신을 옥죄는 스커트 정장 따위 집어치우겠다는 어떤 결심이다.
CREDIT 글 | 김선주(라이프 스타일리스트)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