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 이해할 수 없는 욕망에 관하여

2018.02.28 페이스북 트위터


*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내 야수를 돌려줘!”

소문에 따르면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가 끝나자, 관객석에 있던 그레타 가르보가 저렇게 외쳤다고 한다. 장 콕토의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들도 이 감정이 어떤지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버전 ‘미녀와 야수’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이 야수가 왕자로 변하는 순간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인공 벨도 같은 기분이었던 거 같다. 갑자기 야수가 있던 자리에 나타난, 멀끔하지만 재미없게 생긴 남자를 올려다보며 필사적으로 야수와 비슷한 부분을 찾던 그 주저하는 표정.

괴물 영화의 팬들은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영화 내내 매료되었던 주인공이 죽거나 파괴되거나 존재를 부정당할 때 느끼는 실망감. 죽는 것은 차라리 괜찮다. 하지만 존재가 부정되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야수의 ‘내면’이었다며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평범한 남자의 몸을 야수에게 안긴다.

사회가 허용하는 결말을 맺으려면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장르의 역사가 길어지면 불만이 쌓인다. 왜 이런 결말이 정상인가? 왜 괴물들에겐 다른 결말이 주어져서는 안 되는가. 이 불만을 품은 팬들이 자라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반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가 그중 한 명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린 기예르모는 텔레비전으로 ‘해양괴물’을 보면서 타이틀롤인 양서괴물과 여자 주인공이 맺어지길 바랐던 것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팬 필름이다. 심지어 슬래시 팬 필름이다. 대부분의 2차창작자가 품고 있는 소망 성취의 판타지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일라이자(샐리 호킨스)는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인 것처럼 양서인간 괴물과 맺어진다. ‘킹 콩’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단순히 연민의 정을 품는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섹스까지 한다.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관계를 주도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초라면 이 영화는 극도로 변태적인 포르노로 여겨졌을 것이다.

영화는 일라이자의 욕망을 변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동스러울 정도로 심술궂게 그 욕망의 이질감을 드러낸다. 이 영화의 양서인간은 고무가죽을 뒤집어 쓴 불운한 인간 남자가 아니다. 그는 말 못 하는 짐승이다. 의미 있는 대화가 어렵고 여전히 야수의 본성을 갖고 있다. 이 낯선 느낌을 강조하는 건 양서인간의 눈이다. 킹 콩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고릴라 괴물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감정과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 하지만 델 토로의 양서인간이 가진 눈은 파충류나 양서류, 어류처럼 낯설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일라이자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일라이자가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고 양서인간은 일라이자의 몸과 정신에 새겨진 자연스러운 욕망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일라이자의 목에 난 상처처럼 대놓고 이를 암시하는 장면들도 많으니 이는 델 토로의 계산에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조금 고쳐서 다시 질문해보자. 영화 속 로맨스와 섹스에 대한 완벽한 이해나 몰입이 과연 당연하긴 한 건가? 이건 ‘셰이프 오브 워터’ 영화와 별개로 내가 늘 품고 있던 질문이다. 나에게 이는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셰이프 오브 워터’를 퀴어 영화로 분류한다. 많은 퀴어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이 영화도 주류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소수의 특별한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여전히 태도의 차이가 있다. ‘캐롤’을 만든 사람들은 이 영화의 이상적인 관객들이 캐롤과 테레즈가 서로에 대해 품고 있는 욕망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를 만든 사람들이 가정한 이상적인 관객들은 사정이 다를 것이다. 심지어 델 토로 자신도 이를 완벽하게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 괴물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강렬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을 성적 욕망과 연결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욕망이 있다. 우린 평생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결국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중 어떤 것은 우리의 알량한 이해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것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의 욕망을 완전히 반영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셰이프 오브 워터’가 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한다.
CREDIT 글 | 듀나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