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경 “대본은 소설책이 아니라서 내가 해내야만 한다.”

2017.11.27 페이스북 트위터
KBS ‘고백부부’에서 장발머리를 휘날리던 이이경이, 영화 ‘아기와 나’에서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최하위 계급에 놓인 20대 청춘 ‘도일’을 연기했다. 코믹한 캐릭터와 속을 답답하게 만드는 철없고 순진한 캐릭터 사이에 놓인 배우는 “연기 잘한다”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칭찬에 당혹스러워하는 얼굴 뒤로 수많은 청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끔은 기뻤다가, 기대할 것이 없는 현실에서 치열히 노력하는 이들의 이야기 말이다.



공교롭게도 KBS ‘고백부부’가 끝나자마자 영화 ‘아기와 나’가 개봉했다.

이이경: 정반대의 캐릭터다 보니, 어디서든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커졌다. 둘 다 연기는 내가 했는데 ‘고백부부’ 속 고독재와 ‘아기와 나’ 속 도일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영화 ‘아기와 나’ 기자 간담회에서 마이크를 손에 쥐고 놓지 않더라. 할 말이 많았나.
이이경
: 분위기를 업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순영 역할을 맡은 정연주 씨는 평소에 말을 굉장히 잘하는 친구인데, 그날따라 많이 떨었다. 손태겸 감독님은 모든 질문마다 너무 진지하게 답변하셔서 나는 일부러 밝게 하려고 애를 썼다. 정작 영화에서는 가장 어두운 캐릭터인데. (웃음) 사실 그런 면에서 감독님께는 좀 죄송하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이 다 고독재를 떠올려서?
이이경
: 그렇다. 나와 마주치면 다들 웃음부터 터뜨린다. 영화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라서 개봉할 때가 되니까 걱정이 많이 됐는데, 도리어 감독님은 홍보 잘해주고 있다면서 고맙다고 하시더라.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주변 반응이 궁금해서 요즘은 먼저 영화를 접하신 분들에게 끊임없이 감상을 묻고 다닌다. 나나 감독님은 처음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같이했기 때문에 객관적인 시선이 흐트러진 상태라 정작 우리 작품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관계자들 말고, 가족이나 친구들은 뭐라고 했나. 가볍게만 볼 수 없는 영화인데.
이이경
: 친구들은 영화 보고 나서 별말 없이 술만 마시고 가더라. 내 나이대가 그런 것 같다. 이제 막 30대가 된 우리의 관심사는 연애가 아니다. 사는 것 그 자체다. 결혼했던 친구는 이혼하고, 회사 다니는 친구는 정리해고를 걱정하면서 사업 얘기를 꺼내고. 한편에서는 또 결혼을 하려는 친구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사실 예전에 한창 많이 받았던 질문이 “어떤 연기 해보고 싶어요?”였다. ‘아기와 나’에 끌렸던 이유가 그거다. 쫓기고, 처절하고, 억압되어 있는 20대의 느낌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드라마로는 이런 느낌을 표현하는 게 어려운데, 영화는 가능하니까.

그게 ‘아기와 나’라는 영화 속 도일의 이야기겠다.
이이경
: 도일 캐릭터를 보자마자 남자들 입장에서는 공감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사랑스럽게 행동하지 못한다는 점이 와 닿았다. 그러나 누구나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그때그때 달라지지 않나. 이걸 이중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고백부부’를 보고 나서 “너 많이 힘들었겠다.”고 하시더라. 정작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집에서 나의 밝은 모습을 많이 보이거나, 여러모로 표현을 많이 못 했던 거지.

남자들이 가진 단점을 모아놓은 캐릭터라는 생각도 든다.
이이경
: 맞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남자들의 모습이 담긴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도일이 사실은 현실 속 남자들 모습과 가장 잘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 입장에서 보면 되게 나쁜 남자라고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가장 일반적인 남성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들도 자기 행동과 주변인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여러 가지 오류를 겪고 산다. 도일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만,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 순간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영화 안에서도 조금씩 변해갔듯이 말이다. 게다가 요즘 청년들은 먼 미래를 보고 길게 달릴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 같다. 일단은 눈앞에 놓인 것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면서 도일도 나도 달라져가는 것 아닐까.

그게 요즘 20대와 30대의 삶이기도 하다.
이이경
: 현실적으로는 회사원인 내 친구들을 보며 직접적으로 느낀다. “곧 인사 정리가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야.”라고 하던 친구가, 얼마 뒤에 “이번에는 넘겼어.”라며 안심하는 상황을 반복한다. 삶의 목표라는 것을 정하기 힘든 때 같다. 도일과 순영에게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거다. 물론 두 사람의 과거 같은 영화적인 설정들에 대해 좋다,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관객의 판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백부부’도 평범한 한 시대의, 한 커플의 이야기였다.
이이경
: 나는 그 시대를 산 사람이 아니어서 모르는 게 많지만, 나이트클럽 신에서 코요테와 백지영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데 대충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웃음) 누나가 매형과 함께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그렇게 잘 살면서도 한 번은 저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다고 하더라. 의외였다. 드라마를 보고 많은 분들이 그 시절을 떠올렸나 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코믹한 감초다 보니 다른 배우들과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나이트 신에서 마진주(장나라)와 최반도(손호준)가 서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구토를 한다. 호준 형이 감정 잡고 있는데 나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웃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같은 소속사 배우인 조성하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는 면이 있다. 이름보다는 독특한 역할로 더 먼저 기억이 된다.
이이경
: 예전에 드라마 대본이 잘 안 읽혀서 절실한 마음으로 연락드린 적이 있다. 분당으로 찾아갔는데, 만나자마자 밥을 먹이시더라. 그러고는 카페에 가서 와플 같은 달콤한 디저트를 잔뜩 사주셨다. 배가 터질 것 같을 정도로 먹이시기에 ‘와, 이러다 내가 잘못되겠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가 조용히 말씀하시는 거다. “이미 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고민을 정말 많이 했을 텐데, 그게 정답이야.” 본인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라면서 웃으시는데, 굉장히 감동받았다.

tvN ‘초인시대’ 때도 그랬고, 엉뚱하거나 예민한 역할을 꽤 많이 맡았다.
이이경
: 그런 역할을 받았을 때 중요한 게 있다. ‘이걸 내가 어떻게 해?’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는 그 역할에 접근하기 어려워진다. 좀 이상하다 싶어도 무조건 해내야 하는 게 내 몫이다. 당연히 무섭고 어려운 부분도 있다. KBS ‘태양의 후예’ 강민재가 극한의 상황에서 “아이, 귀찮아. 그냥 죽을래.”라는 대사를 쳐야 할 때 그랬다. 내가 받아든 게 소설책이면 다음 페이지로 편히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본이라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내가 해내야만 했다.

대본을 하나의 글이라고 표현한다.
이이경
: 글이지만, 조금 묘한 글이다. 배우 입장에서는 문어를 구어로 체화하는 과정 같다. 그 안에서 느끼는 한계도 있다. 감독님이나 작가님은 전체를 숲처럼 보고 연출하시지만, 배우인 나의 입장에서는 마치 쭉 서 있는 나무들을 따라가는 느낌으로 대본이라는 글을 읽는다. 여기에 앵글을 그리면서 읽다 보니 남들보다 더 느린 것 같다. 소설책 볼 때도 그걸 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읽어서 속도가 늦다.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인가.
이이경
: 솔직히 지금은 아니다. 군대에 있을 때 이틀에 한 번꼴로 자기계발서를 엄청 읽은 뒤로는. (웃음) 나는 그때 도일이랑 똑같았다. 나와서 뭘 해야 할지 모르니까 무턱대고 읽었다. 그런데 모든 책에서 같은 얘기를 하더라. 도전해라, 부딪혀라, 먼저 움직여라. 그래서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다른 내 친구들처럼.

어떤 연기자가 되고 싶나.
이이경
: 그냥 연기 잘하고 싶은 사람이다. 큰 규모의 영화든, 작은 규모의 영화든 나만의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대형 작품에서 스코어를 책임지는 선배들이 있다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이이경만의 롤인 거다.

언제까지 칭찬에 부끄러워할 건가.
이이경
: 아직 적응이 안 됐다. 꼭 적응해야 하나? (웃음)
CREDIT 글 | 박희아
사진 | 이진혁(KoiWorks)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