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카펫 위, 수트를 입은 여배우들

2017.11.17 페이스북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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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배우들이 드레스 대신 수트를 입는 것은 이제 흔한 풍경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시상식 레드카펫에 간헐적으로 등장했던 수트는 이제 드라마․영화 제작발표회, VIP 시사회, 브랜드 행사장 등 미디어에 노출되는 거의 모든 공식 석상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젠더리스, 머스큘린, 페미니즘이란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춰 드레스 대신 선택하는 배우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만 부산국제영화제의 문근영․하지원, 2018 S/S 헤라 서울패션위크의 최강희, 엘르스타일어워즈의 임윤아․장윤주, W KOREA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 자선행사의 김성령․김소연․차예련․이민정 등이 수트를 선택했다.

분기점은 2016년 칸 영화제 레드카펫이었다. 줄리아 로버츠, 수잔 서랜든,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당시 ‘이브닝드레스+하이힐’이란 드레스 코드를 깼고, 이는 전 세계 쇼비즈니스 산업의 여성 구성원들에게 강력한 시그널이 되었다. 특히 레드카펫에서 ‘순백의 여신’이거나 ‘동화책 찢고 나온 공주’, 그도 아니면 ‘깊이 파인 가슴골’ 또는 ‘청순․우아․섹시 공존’ 등의 수식어로 분류되는 국내 배우들에게. 김혜수는 같은 해 11월 청룡영화제 레드카펫에서 블랙 수트를 입고 등장, 이브닝드레스에 국한됐던 국내 ‘톱스타’들의 레드카펫 공식을 허물어뜨렸다.

올해는 이 같은 흐름이 핵분열을 거듭하는 상황이다. 배우들은 더 이상 상하의 배색을 통일한 수트만 고집하지 않는다. 재킷과 팬츠를 따로 떼어 다른 아이템과 자유롭게 섞는다. 한지민이 지난 5월 백상예술대상에서 플리스 디테일 롱 화이트 원피스 위에 크롭 박시 재킷을 걸친 것처럼 스타일을 변형한다. 문근영이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린지 칼라의 골드 메탈릭 시스루 턱시도 재킷을 선택한 것처럼 다양한 소재에 도전한다. 지난 2일 엘르스타일어워즈의 임윤아처럼 큼지막한 보타이로 걸리쉬 수트 룩을 선보이기도 한다. 아니면 KBS ‘마녀의 법정’ 제작발표회의 정려원처럼 크롭 재킷에 랩 펜슬 스커트를 입어 한 벌의 말쑥한 블랙 수트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기본 과정을 넘어 본격적인 심화 과정으로 나아간 것이다.

수트 패션의 다변화는 대중의 취향도 확실하게 건드린다. 매니시룩은 중성적인 매력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잘만 소화하면 ‘한국의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되어 반항아적인 매력을 확보할 수 있다. 이른바 ‘사이다 캐릭터’에 대한 기대 심리에 부응할 수도 있다. 수트 패션은 실용성 면에서도 드레스를 압도한다. 킬힐에 드레스가 밟힐까 조심하면서, 행여 속바지가 노출될까 옷매무새를 다듬으면서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착석해서도 ‘여배우의 필수 아이템’이란 이상한 별칭이 붙은 무릎담요에서 해방될 수 있다. 제작발표회에서 치마 속이 촬영되는 불상사를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성 배우가 여성 배우의 무릎담요를 내려 신체 일부를 노출시키겠다고 공약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드레스 대신 셔츠에 재킷을 걸치면 몸을 숙일 때마다 자동반사적으로 가슴골을 가리던 손도 자유로워진다. 배우는 원치 않는 노출에 대한 부담 없이 공식 석상에서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소모적인 드레스 공수 전쟁에서도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다. 수천만 원대의 해외 명품 드레스보다 수백만 원대의 국내 브랜드 수트가 상대적으로 확보하기 쉽기 때문이다. 김고은이 올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입었던 턱시도 드레스, 문근영의 부산국제영화제 수트는 각각 국내 브랜드인 브라이드앤유, 제이백쿠튀르의 제품이다. 협찬 가능한 명품 브랜드의 급이 스타의 위상과 직결되는 관행을 배우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다. 동료들이 수트 패션으로 쏠리자 차별화 전략으로 고가의 명품 수트를 선택하는 스타들도 있지만, 드레스 위주로 입어야 했던 예전에 비하면 선택할 수 있는 브랜드와 의상 폭이 확실히 넓어졌다.

문소리는 지난 9월 공개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포스터에서 붉은 킬힐을 신고 붉은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채 트랙 위를 달렸다. 그는 같은 달 SBS 러브FM ‘송은이 김숙의 언니네 라디오’에 출연해 “여배우의 삶이 화려하고 우아해 보이지만, 드레스 입고 힐 신고 달리니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1만 관객 돌파를 자축하는 포스터에서 같은 옷을 입고 트랙 위에 널브러져 있던 문소리의 모습은 배우라는 직업 자체의 고달픔, 그리고 신체를 옥죄는 의상에 정기적으로 몸을 욱여넣어야 하는 여성 배우의 애환을 동시에 보여줬다. 그러면서 ‘여배우=드레스’란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비틀었다.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자발적으로 다양한 가격대의 드레스를 선택하는 것과 업계의 관행에 끌려다니며 초조하게 고가의 해외 명품 드레스를 확보해야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오는 25일에는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제38회 청룡영화상이 열린다. 김혜수를 뛰어넘는 수트 룩으로 세간의 편견을 다시 한 번 깨줄 배우가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CREDIT 글 | 김선주 (라이프스타일리스트)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