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지하비밀벙커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2017.11.09 페이스북 트위터


시작은 언젠가부터 서울 시내 곳곳에 붙어 있던 포스터였다. 서울시 지도 위에 커다랗게 쓰인 ‘잘생겼다 서울 20’이라는 표어는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모 통신사 CM송의 익숙한 멜로디를 떠올리게 할 뿐, 별다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무심히 지나치기를 몇 번, 지도에 표시된 익숙하고도 낯선 지명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이름조차 수상한 ‘여의도 지하비밀벙커’였다. 그리고 지난 10월 19일, 서울시는 ‘여의도 지하벙커’와 ‘신설동 유령역’, ‘경희궁 방공호’의 존재를 공개하며 앞으로 서울의 숨겨진 유휴공간을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보낼 것을 약속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 거주한 지 8년, 서울이라는 도시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빡빡한 인간의 숲’이었다. 그런데 ‘유휴공간’이라니. 도시 전설에나 등장할 법한 비밀 공간들이 공개 되면서 언론에서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난 시설로 추정된다는 ‘여의도 지하벙커’나 왕과 왕비의 침전 바로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는 ‘경희궁 방공호’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흥미로웠다. 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지금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여의도 지하벙커

가장 단순명료한 답은 ‘도시재생’이다. 서울시에서는 2015년부터 2025년까지 서울형 도시재생을 해나가겠다고 공표했다. 서울시 도시재생본부 재생정책과 박현정 주무관은 “실질적으로는 2013년부터 뉴타운 수습 정책의 일환으로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해왔다. 지난 5월 공개된 ‘서울로 7017’을 시작으로 올해 들어서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로 7017’이나 ‘여의도 지하벙커’만큼 화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포 문화비축기지’, ‘돈의문 박물관마을’, ‘세운상가’ 등도 새롭게 단장해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서울 도시재생 포털’에 공개된 바에 따르면 서울형 도시재생 중점 추진 지역만 27곳으로, 앞으로 더 많은 서울의 공간들이 탈바꿈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재생’이란 무엇인가.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은 재개발과 도시재생의 개념을 혼동하는 것이다. 도시재생은 오히려 재개발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에 가깝다. 재개발이 도시의 물리적 확장과 편리성에 중점을 둔다면, 도시재생은 도시의 역사성과 현재성을 통해 그 도시만의 정체성을 찾는 데 집중한다. 현재 서울시에서는 도시재생 중점 추진 지역을 ‘저이용 저개발 중심지역’, ‘쇠퇴 낙후 산업(상업) 지역’, ‘역사 문화 자원 특화 지역’, ‘노후 주거 지역’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각각의 공간이 어떤 목적으로 재생되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저이용 저개발 중심 지역’에 해당되는 ‘서울로 7017’을 예로 들면, 과거 철도교통의 중심지였던 서울역 인근이 쇠퇴하며 방치된 고가도로를 보행로로 바꾸어 ‘서울 4대문’ 안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관광코스로 만들었다. ‘쇠퇴 낙후 산업 지역’을 대표하는 세운상가나 ‘역사 문화 자원 특화 지역’인 정동, ‘노후 주거 지역’에 해당되는 창신, 숭인 지역 등도 마찬가지로 명시된 목적에 따라 재생됐다.

경희궁 방공호

하지만 서울시의 도시재생 정책에는 늘 실효성 논란이 따라다닌다. 땅값이 올라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되기도 하는 재개발과 비교했을 때 도시재생은 추상적인 면이 있다. 박 주무관은 “동네의 환경이 좋아진다고 하면 누구라도 좋아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보다는 ‘자신의 집’에 뭔가 플러스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게다가 도시재생은 빠른 시간 내에 어떠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실제로 2013년에 시작된 도시재생 사업은 2017년 하반기가 되어서야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첫 단추인 ‘서울로 7017’이 공개됐을 때, 가장 화제가 된 것은 우스꽝스러운 슈즈트리와 비극적인 추락 사건이었다. 하지만 ‘서울로 7017’이 모티브로 삼은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 역시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1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빨리 빨리’가 미덕으로 통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도시재생에 걸리는 시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의도 지하벙커에 방문했을 때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오후 12시쯤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이었다. 신설동 유령역에서는 방문자들이 직접 활용방안을 적는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좀비런 장소로 딱이다’라는 다소 황당하지만 재미있는 의견부터 ‘여름에는 공포영화, 평상시에는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까지 적혀있었다. 경희궁 방공호를 방문한 날에는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체험자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경희궁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 방공호를 없애게 될 수도 있다는 박물관 관계자의 말에 그들은 ‘아픈 역사가 새겨진 의미 있는 장소를 왜 없애냐’며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시민들의 공간을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도시재생의 의미가 와 닿은 순간이었다.

신설동 유령역

박 주무관은 “서울시는 역사가 상당히 짧은 도시다. 서울시 평균 거주 일수가 4년 이하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주거성도 약한 편이다. 즉, 서울시가 내 고향이라는 인식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공동체성도 떨어진다. 도시재생은 서울이 시민들에게 가치 있는 장소가 되기 위한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도시재생이 끝난 후 해당 지역의 시민들은 자력재생 단계에 들어간다. 박 주무관에 따르면, 최근 사업이 완료된 창신, 숭인 지역의 경우 주민들이 나서서 협동조합 법인을 설립해 수익을 창출하고 시설을 보강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울시민이라면 누구나 해당 지역의 주민협의체나 도시재생 센터를 찾아가 직접 도시재생에 대한 의견을 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도시재생은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시민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형 도시재생이 성공으로 끝날지, 미완으로 끝날지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처음으로 서울이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도시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참고 도서
‘우리가 알아야 할 도시재생 이야기’. 윤주. 살림지식총서
CREDIT 글 | 서지연
사진 | 서지연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