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캔 스피크’가 말하는 것

2017.09.20 페이스북 트위터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가장 뭉클한 대목 중 하나는 결국 티격태격하던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에게 영어를 배우게 된 할머니 나옥분(나문희)이 이태원 펍에서 외국인들과 게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다. 처음에는 민재가 내준 일종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인에게 접근한 것이지만, 대화에 익숙해진 옥분은 능동적으로 전에 없던 경험을 하며 새로운 관계망을 구축해간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영어는 옥분이 하고 싶었던 일, 어렸을 때 입양을 가서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친동생과 전화 통화라도 하고 워싱턴에서 위안부 경험을 증언하는 것을 위해서만 쓰이지 않는다. 옥분은 영어를 배움으로써 “일본은 내가 언제 죽을지 기다리고 있는” 노년에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다.

희생자의 상처가 안타깝고 비극적이라고 말하며 애도하는 것을 넘어, 할머니가 여생을 즐기면서 보내실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다. 열심히 영어를 배운 덕분에 옥분은 혼자 해외여행을 부지런히 다닐 수 있고 “뉴스에서 아베 헛소리 하는 거 봤냐?”고 화를 내며 오래 살겠다고 씩씩하게 파워워킹을 한다. 희망을 말하는 영화의 태도는 당사자에게 무례하지 않고 오히려 진일보한 좋은 방식이 된다. 주변에 오지랖을 떠느라 ‘도깨비 할매’라는 별명을 얻고 심지어 같은 동네에 사는 혜정(이상희)에게는 ‘정신병자’라는 말을 듣는 옥분은 결점 하나 없는 피해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가족 하나 없이 외롭게 살아와서 동네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에 간섭을 하게 됐지만, 그 때문에 일을 처리해야 하는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일 수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무고한 희생자의 프레임에 가두어 놓는 것보다 그를 평범한 이웃으로 대접한다. 그것이 피해자에게도 더 예의 있는 행동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그로부터 가능한 타인과의 연대가 비로소 위로를 가능케 하고, 주체성을 갖게 된 옥분은 과거의 고통에 대한 고백도 스스로 선택한다. 미국 하원 의회 공개 청문회에 참석한 옥분이 영화의 제목대로 “아이 캔 스피크”를 선언하기를 기다린 후, 그의 육성을 통해 과거를 전해 듣는다. 옥분의 몸에 남겨진 역사의 상처를 보여준 것 역시 그의 의사였다. 지난해 개봉한 ‘귀향’은 아직 청산되지 않은 위안부 이야기를 다시 소환해냈다는 성취는 거뒀지만 피해자의 아픔을 지나치게 전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처럼 누군가의 고통을 보여줄 때 창작자의 선의가 작품의 완성도나 윤리성까지 보장할 수는 없다. ‘아이 캔 스피크’의 윤리는 고발하는 타인의 사명감보다 피해자의 의사를 가장 중요시하는 데에서 터득된다.

‘아이 캔 스피크’가 거둔 윤리적 성취와 새로움은 공교롭게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발견되는 고질적인 문제점과 정확하게 대비된다. 특히 2017년은 남성 위주의, 정확히는 중년 남성이 무리지어 등장해 검․형사 혹은 조폭을 연기하는 작품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오래된 지적부터 무례한 약자 혐오나 자극적인 폭력 묘사까지 뒤엉키며 유독 구설수가 많았다. 그만큼 관객의 의식은 바뀌어가지만, 창작자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아이 캔 스피크’는 올해 개봉 상업영화 중 거의 독보적으로 시대의 흐름에 응답한다. 전에는 좀처럼 주체적인 목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여성이자 노인에게 이야기의 제대로 된 주도권을 쥐어주자 신선하면서 윤리적이기까지 한 작품이 나왔다.

고발이나 현실 반영을 이유로 과도한 연출이 등장한다거나 비슷비슷한 중년 남성 위주의 작품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비판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패는 “잘 팔리니까”다. 시장에서 연이어 흥행성이 검증되면, 상업 논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창작자들은 지금의 추세를 이어나갈 명분을 갖는다. 같은 이유로, 다른 방식으로 만든 작품의 성공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만들 명분을 줄 수 있다. 또한 CJ 문화재단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이었던 ‘아이 캔 스피크’는 롯데 엔터테인먼트가 공동배급으로 뒤늦게 합류하기 전까지 중소배급사 리틀빅픽처스가 릴리즈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이는 허리급 영화가 힘을 잃고 100억 이상이 투입된 작품을 4대 배급사가 공격적으로 밀던 지난 몇 년 충무로의 분위기와도 대치한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재심’, ‘프리즌’, ‘보안관’, ‘박열’ 등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규모의 작품이 흥행한 사례가 많았는데, ‘아이 캔 스피크’는 신중하면서 신선한 태도까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귀추가 주목되는 면이 있다. 이번 추석 극장가에서 관객들이 보여줄 선택은 어떤 방향이 됐든 한국 영화계가 나아갈 방향에 의미하는 바가 있다.
CREDIT 글 | 임수연('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