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봉준호가 맞이한 진실

2017.07.05 페이스북 트위터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에서 모든 어른들은 미자(안서현)에게 거짓말을 한다. 할아버지 희봉(변희봉)은 슈퍼돼지 옥자를 미란도 코퍼레이션에서 샀다고 했지만 오히려 돈을 받아 돼지 모양의 금괴를 만들었다. 옥자는 미자가 아는 것과 달리 자연이 아닌 실험실에서 태어났다. 이를 폭로하려는 동물 해방단체 ALF는 미자에게 옥자 귀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 미란도 코퍼레이션 실험실로 보내자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이 어린 소녀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이 옥자를 끌고 가는 것도, ALF의 제안도 거부할 수 없다. 통역을 맡은 ALF 단원 케이(스티븐 연)가 거짓말을 한다 해도 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들은 모두 미리 답을 정해놓고, 미자가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의 현남(배두나)부터 ‘설국열차’에서 설국열차를 위해 열차 부품 취급받는 아이들까지, 봉준호 감독은 은폐된 진실이 그 사회의 약자들을 내모는 과정을 보여주곤 했다. ‘괴물’의 정부나 ‘설국열차’의 윌포드, ‘옥자’의 미란다 코퍼레이션 같은 권력이 저지른 죄를 현남, ‘괴물’의 현서(고아성) 가족, ‘설국열차’의 꼬리칸 승객들이 밝히려 노력한다. 그러나 진실은 알 수는 있어도 폭로하기는 어렵고, 진실의 무게는 꼬리칸 리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마더’의 엄마(김혜자)처럼 그 사회의 약자들이 짊어진다.  10대 소녀에 영어도 거의 못하는 미자는 그 중 가장 약자로, 옥자를 되찾으려면 미란도 코퍼레이션과 ALF 어느 쪽이든 따라야 한다. ALF의 모든 주장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옥자가 끌려온 도살장의 수많은 슈퍼돼지들을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라본다. 진실을 알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플란더스의 개’와 그 다음 작품 ‘살인의 추억’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옥자’는 약자가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틸다 스윈튼)는 슈퍼돼지가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자랐다는 거짓을 만들기 위해 슈퍼돼지들을 농가에 보냈다. 그는 대중을 속이려 했다. 하지만 ALF의 폭로로 그의 계획이 실패한 뒤, CEO로 돌아온 쌍둥이 언니 낸시(틸다 스윈튼)가 내놓은 해결책은 슈퍼돼지의 가격을 낮추는 것이었다. 낸시는 대중이 알고도 먹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악인이나 권력자만 은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이 사실상 공생관계에서 도와주기 때문도 아니다. ‘옥자’는 모든 대중을 어느 정도 공범이라 말하는 듯 하다. 그들은 쉽게 속아 넘어가고, 속지 않아도 묵인하기도 한다. 진실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것은 가장 약한 피해자 뿐이다. 그리고 미자는 금으로 만든 돼지로 낸시에게 옥자 한마리를 겨우 돌려 받는다. 주인공이 상대방이 준 돈,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체제에 순응하며 겨우 원하는 것을 하나 얻었다. 수많은 다른 피해자들을 뒤로 한채.

그러니 진실을 추적할 필요도,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의 두근거림도 없다. 액션은 미자가 옥자를 구할 때 외에는 쓸모 없다. 답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긴장감을 연출할 수도 없다. 대신 국적 기업의 이미지 세탁, 올바른 가치를 위해 싸운다지만 행동 방식은 전혀 올바르지 않은 이들을 비웃는다. 루시는 우스꽝스러운 성격 파탄자고, AFL은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미디어는 여기에 동참하고, 대중은 속아 넘어가거나 속는 척 한다. “미란도는 좆됐다(Fucked)”는 대사는 ‘옥자’의 태도처럼 보인다.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건재할 것이다. AFL은 미란도 코퍼레이션에게 철저하게 당했다. 그래도 옥자 같은 존재들이 다수를 위해 희생되는 현실을 보라고 외친다. ‘옥자’의 풍자가 계몽으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오랫동안 싸워도 이길 수 없고, 피로가 늘어간다. 할 수 있는 것은 이거라도 봐달라는 것 뿐이다. 

그런데, ‘옥자’의 풍자와 계몽은 세상을 단순화 시킨 결과물이다. ‘옥자’의 모든 캐릭터는 마치 보도자료용 인물 소개를 그대로 옮겨온 것처럼 단순하다. 산골에서 자라 함께 자란 슈퍼돼지를 가족처럼 아끼는 순수한 소녀, 슈퍼돼지를 사업에 이용하려는 악한 자본가, 자본가를 공격하는 테러리스트. 미자를 아끼기 때문에 미자를 속여야 했던 희봉 정도가 예외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위선적이고, 대중은 그들의 의도에 따라 손쉽게 넘어간다. 실물이 공개되지 않았던 슈퍼돼지가 서울에서 온갖 사고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없다. 여론은 루시의 지시 하나에 바뀐다. ‘옥자’에는 풍자 대상에 대한 거친 발언들만 있을 뿐,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풍자를 위해 전형적인 캐릭터를 활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옥자’에서 모든 사건의 출발은 미자가 옥자를 가족으로 여기며 사랑한다는데 있다. 하지만 옥자에 대한 미자의 사랑은 하룻 동안 일상을 같이 하는 장면들로만 설명된다. 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다 옥자와 10년째 사는 미자가 굳이 새로운 길로 집에 가자고 하고, 사고를 당해 옥자가 구해준다. ‘옥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풍자하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는 굳이 하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AFL 단원들은 동물 해방을 위해 사는 존재임에도 옥자를 어떤 학대를 받을지 모를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실험실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누구도 이 결론을 위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죄책감을 털어놓거나 자기합리화의 과정도 없다. ‘옥자’역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꽤 많은 것을 무시하거나 감추고, 이를 바탕으로 풍자를 구호처럼 외친다. 다국적 기업이 여론을 조작한다, 어떤 자들은 대의의 정의를 위해 모든 것을 정당화 시킨다, 대중은 대부분의 진실에 큰 관심이 없다 등등. 루시와 낸시는 쌍둥이고, 두 사람의 아버지는  지극히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돈을 벌었다. 낸시는 아버지처럼 오직 돈을 버는데 혈안이 돼 있고, 루시는 사실상 같은 방식으로 돈을 벌되 대중에게는 보다 윤리적인 이미지를 만들고자 한다. 옛 자본가로부터 탄생한 서로를 싫어하는 두 자본가. 하지만 그들은 같은 얼굴을 가졌다. 시대에 따라 이미지만 바꾸는 자본주의의 얼굴은 똑같다. ‘옥자’는 러닝타임 내내 이런 구호들을 내용만 바꿔 반복한다. 

‘옥자’의 연출이 현실과 판타지 사이에서 애매하게 걸쳐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미자는 달리는 차에 뛰어들거나 매달릴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을 가졌다. AFL단원들은 마취총에서 주사가 발사되자 우산으로 막는다. 그러나 ‘옥자’는 동시에 미란도 코퍼레이션과 AFL을 통해 현실의 어떤 조직들을 연상시키게 만들고, 비웃는다. 그래서 ‘옥자’의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들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완결되지 못한다. 마치 만화주인공처럼 과장되게 묘사되는 캐릭터들이 사는 세상이지만,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업 회의실 같은 곳이다. ‘설국열차’는 이미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관을 가졌고, 그래서 스토리를 현실에 대한 은유나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됐다. 이미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문제와 고민을 안고 있었다. 반면 ‘옥자’는 작품의 설정에 현실에 대한 풍자를 직접적으로 담는다. 그만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지만,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야할 이유는 제시하지 못한다. 

다국적 기업이 진실을 은폐한다.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단적으로, 역시 넷플릭스가 제작하는 드라마 ‘블랙미러’가 있다. 이 작품 역시 가상의 기술이나 근미래의 상황을 넣고 거기서 생기는 문제들을 통해 현대문명을 풍자한다. 여러 에피소드에 나눠 현대문명의 다양한 문제들을 짚어내면서 더 복잡하고 구체적인 소재를 다룰 수도 있다. ‘옥자’가 SNS를 사진을 찍어 올리면 정보가 전파되는 미디어 정도로 다룬다면, ‘블랙미러’는 SNS의 평판이나 개인에 대한 사이버불링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깊게 다룬다. 필요하면 그럴듯한 CG를 쓰고, 1980, 90년대의 풍경을 재현할 수도 있으며, UHD영상과 5.1채널 사운드도 제공한다. ‘옥자’가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된다고 했을 때, 논의의 초점은 영화가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에 동시 상영된다는 점에 있었다. 하지만 ‘옥자’를 통해 넷플릭스에 가입한 사람들은 넷플릭스에 ‘옥자’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이미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와 넷플릭스에서만 서비스 되는 자체 제작 작품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옥자’가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은 영화가 됐을까, 아니면 넷플릭스라는 장르에 속하게 됐을까. 한 다국적 기업이 콘텐츠에 대한 정의를 바꾸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옥자’가 제기하는 가장 흥미로운 문제는 이것처럼 보인다. 

다시 한 번, 봉준호 감독은 ‘플란더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를 연출했다. 굳이 부연하자면, ‘괴물’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그가 ‘옥자’만큼만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는 보여주지 않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AFL 단원 제이(폴 다노)는 옥자가 학대당하는 영상을 폭로하면서, 미자에게 뒤돌아 영상을 보지 말라며 말한다. “Don’t look back” ‘옥자’에서 옥자가 학대 당하거나, 슈퍼돼지들의 도축 장면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수많은 슈퍼돼지들이 모여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은 정서적 충격을 주기 좋지만, 마치 배경처럼 담담하게 지나간다. ‘옥자’의 대사는 노골적일 만큼 메시지를 던지지만, 시각적 충격은 적다. 그리고 단순한 캐릭터와 사건으로 ‘옥자’의 풍자를 쉽게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두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봉준호 감독이 한 줄의 메시지가 주는 계몽을 위해 많은 것을 감췄다. 아니면 봉준호 감독 스스로도 이 문제를 더 깊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들여다 보기 싫었거나. 다만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진실은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고, 가장 약한자들이 은폐된 진실의 짐을 짊어졌다. ‘설국열차’에서는 모두가 아이들을 착취한다는 진실에 공멸까지 선택했다. 그리고 ‘옥자’에서는 세상에 대한 무력감마저 느껴지는 풍자를 택했다. 영화 마지막, 미자와 희봉은 식사를 한다. 영화 전반부에서 우리에 갇혀 있던 닭들은 마당에 풀려 나와 뛰고 있다. 밥상 위에 있던 냄비는 원래 물고기와 닭을 요리해 담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냄비 뚜껑은 닫혀 있고, 뚜껑이 열릴 때는 희봉의 몸으로 화면에서 가려진다. 그 옆에는 희봉이 따온 야채들이 쌓여 있다. 그들이 냄비에서 먹은 것은 무엇일까. 동물일까, 아닐까. 봉준호 감독은 두시간 가까이 인간의 육식이 빚어내는 끔찍함을 보여줬지만, 관객에게 눈에 보이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 그가 생각하는 인간이고, ‘옥자’가 더 이상 ‘괴물’이나 ‘설국열차’ 같을 수 없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CREDIT 글 | 강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