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원더우먼’

2017.06.02 페이스북 트위터


에 ‘원더우먼’ 영화를 반평생 기다려온 프로젝트라고 말한 적 있다. 말해 놓고 맞는지 계산을 해봤다. ‘고스트 버스터즈’ 시리즈의 아이번 라이트먼 감독이 ‘원더우먼’ 영화화를 발표한 게 1996년. 완성될 때까지 21년이 걸린 셈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겐 평생보다 긴 시간이다. 그 동안 있었던 별별 일들을 다 모으면 책 한 권이 나온다. 조스 위든의 포기, 실패한 텔레비전 파일럿, 그밖에 이 역을 거쳐간 수많은 배우들과 감독들. 텔레비전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린다 카터가, 차세대 원더우먼은 캐서린 지타-존스가 딱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 게 기억난다. 이 정도면 얼마나 묵었다가 나온 영화인지 느낌이 오시겠지. 

나에게 원더우먼은 개인적인 애착이 있는 캐릭터다. 내가 처음으로 접한 코믹북 히어로. 나에겐 우스꽝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이상한 사람들로 채워진 이 세계의 중심점인 셈이다. 물론 린다 카터 주연 텔레비전 시리즈가 먼저였다. 나는 ‘바이오닉 우먼’인 제이미 소머즈의 팬이기도 했으니, 여성 수퍼히어로가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존재라고 믿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요새 DC 코믹스에선 70년대 원더우먼과 바이오닉 우먼이 팀으로 나오는 크로스오버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볼 때마다 감동받는다.) 그러다가 그 맥이 갑자기 뚝 끊기자 진짜로 당황했다. 미국 드라마 ‘버피’가 나올 때까지 나는 이 변화된 텔레비전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원더우먼’ 영화화는 유리천장을 깨는 새로운 도전이 아니라 원래 당연했던 세계의 복구다. 

드디어 기다림이 끝이 났다. 그리고 패티 젠킨스 연출의 ‘원더우먼’은 상당히 준수하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러 모로 기념비적인 영화다. 그의 ‘원더우먼’은  그동안 문제거리로 남았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한다. 여성 수퍼히어로의 몸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 그 캐릭터를 어떻게 현실세계에 가져다 놓고 충돌시키는가에 대한 대답, 어떻게 여성 수퍼 히어로가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증명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 모두 이 영화에 있다. 젠킨스가 앞으로 앞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감독할 수많은 여성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젠킨스의 영화는 오래 전에 신선함을 잃어버린 코믹북 수퍼히어로 장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 그 새로운 바람은 이 영화가 '쿨해지려는' 여분의 노력 없이 기본을 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젠킨스의 ‘원더우먼’은 적어도 클라이맥스의 최종 전투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마치 이전에 코믹북 원작의 영화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다소 미심쩍었던 제1차 세계대전 배경도 생각보다 훨씬 잘 쓰였다. 페미니즘 부상과 현대전의 탄생, 그리고 본격적인 20세기 시작. 지금 보니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그럴싸하다. 앞으로 나올 속편들이 계속 20세기의 역사를 판다면 좋겠다. 그렇다면 쉽게 진부해질 수 있는 수퍼히어로 유니버스로부터 이 캐릭터를 보호하며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기다려 이렇게 만족스러운 영화를 얻었으니 당연히 안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복병이 있다. 나로서는 주연배우의 성향이 무엇이건 영화외적인 면은 잊고 ‘원더우먼’만을 순수하게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대 관객이 그렇게 편리하게 무지할 수 있을까. 본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캐릭터만 보는 건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고 그걸 잊으라고 말할 수도 더더욱 없다. 

덕택에 젠킨스의 ‘원더우먼’은 내가 원했던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영웅담이 아닌, 보다 멀찌감치 떨어져 냉정하게 감상하게 되는 보다 복잡한 영화가 되었다. 순진무구한 이상주의자 영웅이 전쟁의 더러움을 온 몸으로 겪으며 보다 깊이 있는 인물로 성장한다는 이 고전적인 이야기는 의도와 상관없이 딸려온 또다른 현대사와 계속 평행선을 그리며 영화 내내 괴상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이 평행선은 어떤 때는 너무나도 노골적이라 거의 음모론을 제기하고 싶을 정도다. 당연히 나는 이 상황이 신경쓰인다. 내가 거의 평생 동안 사랑해왔던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를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서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열심히 머리를 쓰며 고민하던 나는 이 역시 ‘원더우먼’ 영화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현실세계에서 완벽한 악의 처단과 선의 복구는 불가능하고, 우린 모두 다양한 결을 가진 결점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대항하면서 수많은 전선에서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 나는 시리즈가 이 주제를 계속 판다면 영화와 현실이 연결된 이 큰 그림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평생의 팬으로서, 난 이런 천진난만한 낙천주의라도 있어야 안심할 것 같다. 
CREDIT 글 | 듀나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