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투게더3]와 기안84, ‘예능 짝짓기’의 폭력

2017.01.16 페이스북 트위터


엄현경은 단지 “잘생긴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해왔을 뿐이었다. 이것은 ‘여자들은 무조건 잘생긴 남자만 좋아하더라’는, 다분히 시샘 어린 선입견과는 다른 이야기다. 한국에서 젊은 싱글 여성이, 그것도 TV 예능에서 자신의 입으로 남성의 외모에 대한 선호를 뚜렷하게 밝히는 것은 그 자체로 작은 해방감을 주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20일, 그가 MC로 출연 중인 KBS [해피투게더3]의 인사이동과 함께 사태는 시작되었다. 새 코너 ‘백문이 불여일짤’의 패널인 웹툰작가 기안84를 소개하면서, 유재석은 “엄현경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라고 물었다. 기안84는 엄현경을 향해 대뜸 “남자친구 있어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어차피 사귀지도 못할 건데 뭘”이라고 말했다. ‘뜻밖의 상남자’, ‘쿨내 폭발’이라는 자막이 그를 장식했다.

11월, 기안84가 엄현경에게 밥 한번 먹자고 했다는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남성 MC들은 ‘기희현이냐, 엄현경이냐’를 외치며 분위기를 몰았다. 엄현경을 선택하고 “분당 놀러 오라”는 말로 좌중의 호응을 얻은 기안84는 “차이면 여기 이제 안 올 거예요”라고 덧붙였다. 안 오면 아쉬운 건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다음 주 방송에서는 전현무의 주선으로 이들이 함께 밥을 먹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엄현경에 따르면, 막상 자리가 마련되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던 기안84는 “아직도 엄현경을 좋아하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카메라 꺼졌을 때는 다르신 것 같아요. 차갑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찰 것도 없이 홀로 식은 그는 방송에 계속 왔다. 12월이 됐다. 기안84의 꿈에 엄현경이 나왔더라는 얘기를 유재석이 언급하자 제작진은 꿈의 내용을 KBS [꽃보다 남자] 영상에 합성해 재구성했다. 전현무는 엄현경에게 “누구 만나는 사람 있죠?”라는 무의미한 질문을 던졌고, 기안84는 꿈에서 엄현경이 ‘남자친구 있다’고 말했다며 깨고 나서 기분이 안 좋았다고 말했다.

해가 바뀌어 2017년, ‘형제’라는 키워드를 두고 유재석은 기안84에게 “엄현경 씨가 여동생이면 어떨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기안84는 “제 친여동생이면요?”라고 되물은 뒤 “그럼 제가 좋아할 것 같은데요. 부적절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요?”라고 덧붙였다.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발언에 전현무가 “공중파에 맞는 멘트를 좀 해주세요”라고 지적했지만, 제작진은 공중파에 맞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닌 이 멘트를 편집하는 대신 “어떤 상황이 돼도 일편단심 엄현경”이라는 자막으로 마무리했다. 다음 주인 1월 12일, [해피투게더3] 팀의 회식 영상이 공개됐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술에 취해, 함께 일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엄현경을 향해 “어쨌든 간에, 니가 너무 예뻐…”라고 말하는 기안84의 모습에 “기안84의 취중진담”, “고백 후 쿨하게 사라진 기안84”라는 자막이 씌워졌다. 꼬박 3개월에 걸쳐, 엄현경이 민망해하며 웃어넘기는 것 이상의 대응을 하지 못하는 사이, 아무도 이것을 멈추지 않았고 모두가 동참했다.

지난해 연말 KBS [연예대상]에 두터운 패딩 점퍼를 걸쳐 입고 등장했던 기안84에 대해 [해피투게더3]는 시상식 패션에 한 획을 그었다며 ‘귀엽게’ 소개했다. 엄현경이 토크&쇼 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을 때 제작진과 함께 무대 위로 올라온 그가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우리 현경이 잘 좀 해주세요!”라고 고함지른 해프닝 역시 “남자답게 한번 대시해봐”라는 박명수의 응원을 위한 발판으로 쓰였다. TPO에 맞는 옷차림을 신경 쓰지 않는 무례함은 ‘태어났으니까 사는 남자’라는 대범한 캐릭터로, 상대와 시청자를 불쾌하게 하는 발언은 ‘방송 부적응자’라는 콘셉트로 포장해주는 너그러움은 그러나 오직 남성들만을 향한다. 나이 들거나 예쁘지 않은 여성들이 메이저 예능에서 밀려나 사라지고, ‘홍일점’으로 간신히 끼게 된 젊은 여성들마저 짝짓기에 대한 집단적 집착 속에서 ‘누군가의 연애 대상’이라는 롤을 억지로 떠맡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SBS [일요일이 좋다] ‘런닝맨’의 송지효는 ‘월요커플’을 중심으로 프로그램 안에서 소비되었고, 유이는 MBC [무한도전]에 갑자기 불려가 광희와의 만남을 강요받았으며, [해피투게더3]에서 독특하고 솔직한 캐릭터로 주목받았던 엄현경은 기안84의 등장 이후 끊임없이 ‘구애받는 대상’으로 끌어내려진다. 심지어 그 구애가 아무리 무례하고 무성의하더라도 자신보다 훨씬 경력이 긴 연장자 남성 동료들과 제작진의 한껏 신이 난 바람잡이 앞에 ‘흥’을 깰 수 없는 위치의 어린 여성이 웃으며 견뎌야 하는 상황. 2017년에도 한국 예능은, 어쩌면 한국 사회는 그러고 있다.

CREDIT 글 | 최지은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