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 소년이여 프로가 되어라

2016.03.21 페이스북 트위터


그리고 인류는 멸망했습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는 어쩐지 이런 결말로 이어져야 할 것 같다. 인류 대표가 인공지능에게 패배했고, 사람들은 곧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거나 그들에게 지배당할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세돌은 3국을 마친 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세돌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다.”

감동적인가? 세계 최고 수준의 바둑 실력을 갖춘 이세돌이 겸손하기까지 하다거나, 인류 전체가 인공지능에게 진 것은 아니니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둑 수업을 받고 열셋에 입단, 열여덟이던 2000년에는 이미 역대 최다연승 기록 부문에서 이창호(41연승), 김인(40연승)에 이어 32연승으로 3위를 기록한 타고난 천재. 전남 비금도 출신의 귀여운 소년이던 때부터 이세돌은 완성된 ‘프로’였고, 그는 자신을 인공지능에 맞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해내야 하는 영웅이나 전사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알파고와의 대국을 어떻게 승낙하게 됐냐는 질문에는 “5분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알파고 자체가 너무 궁금했고, 결정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고 답했으며, 대국을 앞두고 누구한테 가장 의지가 되냐는 물음에는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충분한 실력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바깥의 시선과 목소리는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둘 바둑과 상대일 뿐이다.


그러니까 이세돌은, 천재가 철저한 프로 의식까지 가졌을 때 얼마나 압도적으로 매력적일 수 있는가에 대한 본보기다. 예민해 보일 정도로 마른 몸, 그 몸을 한 팔로 감싸 안고 담배를 피우는 뒷모습, 바둑판을 바라보는 골똘한 표정과 한 수 한 수 바둑알을 내려놓는 예리한 손끝 같은 외양은 차라리 부차적인 요소다. 알파고에게 연달아 세 번을 패하고 4국에서 승리를 거둔 후 모두가 그를 위인처럼 바라볼 때도, 그는 “기본적으로 백보다 흑을 힘들어한다”, “예상하지 못했을 때 대처능력이 떨어진다”는 알파고의 약점을 파악하고 즐거워했다. 알파고와 맞붙은 그가 증명한 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면 이루지 못할 게 없다는 인간 승리 식의 교훈이 아니라, 프로의 품격이다.

한국에서는 희귀한 종류일 이세돌의 이러한 태도는 특유의 소년 같은 해사함과 결합하며 묘한 시너지를 일으킨다. tvN [응답하라 1988]의 최택(박보검)처럼 가지런하게 자른 바가지 머리는 물론, 예전과 달리 걸 그룹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장난스럽게 웃거나 JTBC [뉴스룸]에서 긴장한 듯 쭈뼛거리면서도 할 말은 또박또박 해내는 이세돌의 모습은 MBC [코미디 하우스] ‘노브레인 서바이벌’에 출연했던 스무 살 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려운 과제를 하나하나 깨나가며 성장하는 소년의 서사는 여기에 없다. 이것은 20여 년의 경력을 쌓았음에도 십 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바둑을 재미있어하는, 서른다섯의 천재 소년이자 프로의 이야기다. 그래서 “지루하다기보다는 차별을 둔, 재미있는 바둑을 두고 싶은 생각이 더 많다”([GQ KOREA])던 13년 전 그의 말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처음부터 이세돌의 과제는 바둑을 잘 두는가 못 두는가가 아니라 ‘어떤 바둑을 둘 수 있는가’였음을, 바둑을 잘하는 것은 애초에 그의 목표가 될 수 없었음을, 그것은 건방지거나 파격적인 게 아니라 이세돌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을 말이다.
CREDIT 글 | 황효진
사진 | MBC
교정 | 김영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