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빈 “누군가는 싫어하더라도 내 모습 자체로 사랑받고 싶다”

2014.11.24 페이스북 트위터
김옥빈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배우다. 스물셋 나이에 순진해 보이면서도 고혹적인 눈빛으로 <박쥐>를 무대 삼아 마음껏 뛰놀았고, 신비주의인가 싶더니 공개 연애를 하며 프로젝트 펑크밴드 활동으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여배우들>에서는 다른 배우의 의상을 탐내다 사이즈가 작아 좌절하는 에피소드를 직접 제안했고, XTM <탑기어 코리아>에 출연했을 땐 “밟는 걸 좋아한다”며 신나게 자동차 얘기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대중 앞에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항상 궁금했던 이 사람은 JTBC <유나의 거리>에서 더 매력적인 배우가 되었다. 애교는 없어도 의리가 있고, 인생의 쓴맛을 주로 봤지만 마음이 건강하고 곧은 전과 3범 소매치기 강유나로 살면서 김옥빈은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유나와 많이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이, 소리 내어 웃으며 그가 말하기 시작했다.



7개월에 걸친 강행군을 마쳤다. 어떤가.
김옥빈
: 반년 넘게 하루 서너 시간 자면서 매일 촬영장에서 살았는데, 내일부터는 알람 소리에 깨지 않아도 돼서 좋다. 야외 촬영이 많아서 다들 미니시리즈 세 편 찍는 것 같은 스케줄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시작할 때 ‘한 번도 아프지 말아야지’ 결심했더니 다행히 끝까지 감기 한 번 안 걸렸다. 너무 힘들어서 다신 이렇게 못 할 것 같지만. (웃음)

<박쥐>를 비롯해 <다세포소녀>, <시체가 돌아왔다> 등에서 비일상적이고 독특한 캐릭터를 여러 번 연기했지만 <유나의 거리>는 전통적인 형태의 장편 드라마고, 유나 역시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물이다. 이 작품을 택한 이유는 뭐였나.
김옥빈
: 선택이라기보다 기회가 왔을 때 붙잡은 거다. 일단 그동안의 독특한 캐릭터에 좀 질린 상태였는데 장편 드라마, 서민적인 이야기, 일상적인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김운경 작가님이 워낙 뛰어나신 분이니까 그런 대본을 받아 소화한다는 게 즐거운 일이었다. 우리 드라마 속 사람들은 다 외롭고 지치고 힘들다고 외치지만 서로 사는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봐주고 그 안에서 서로 보듬어주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이 좋았다.

치매에 걸린 도끼 노인(정종준)이 머물게 된 요양원에 다 함께 찾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서 작품이 마무리됐다. 유나와 창만(이희준)은 계속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김옥빈
: 나는 원래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어쩌면 더 긴 여운을 주고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 남는 건, 모든 게 만족되지 않는 상태로 끝나는 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나와 창만 오빠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지금 어딘가에 진짜 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비극적으로 끝났다면 보는 분들도 가슴 아프셨을 것 같다.

<유나의 거리>의 연기자이자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게 있나.
김옥빈
: 과연 어떻게 사는 게 더 좋은 인생인 걸까. 그렇게 무섭고 나쁜 짓 많이 했던 독사(홍석연) 노인이 병에 걸려 신한테 고해성사하듯 “다신 안 그럴게요. 살려주세요!” 하는 걸 보며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병원을 떠나는 독사 노인에게 도끼 할아버지가 가짜 비아그라를 주는 모습 같은 게 따뜻해서 눈물이 나기도 했고, 일용직인 칠복(김영웅)이 아저씨가 “나는 오늘 일을 못 하면 하루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라고 말할 때는 세상의 수많은 아버지들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돈 안 훔치면 자기가 착한 사람인 줄 알아”라는 미선 언니(서유정)의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쉽게 비난하고 헐뜯는 존재들, 그리고 그들을 욕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돌아보게 됐다.

도끼 노인을 통한 외로움과 나이 듦, 죽음에 대한 성찰과 그를 따뜻하게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도 인상적이었다.
김옥빈
: 결국엔 우리도 나이가 들 테니까. 이 사람들의 외로움이 나와 동떨어진 게 아니라 는 걸 생각하면 많이 슬펐다. 어릴 때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지금은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셔서 나만 보면 우신다. 전화통화 하면 어릴 때 내가 몰래 시장 따라갔던 얘기랑 “우리 큰 손주, 서울 가서 고생한다. 나가 항상 너한테 미안하고…” 그런 말씀을 계속 하신다. 우리 드라마 후반에 치매에 걸린 도끼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콜라텍에 가서 이 여사(이제신)님한테 “춤 한번 추실까요?” 한 다음 모든 사람이 상상 속에서 함께 춤추는 장면이 있다. 가장 행복한, 동화 같은 모습인데도 대사를 하고 나니까 이상하게 눈물이 막 쏟아져서 밖에 나와 울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라도 <유나의 거리>는 정말 나에겐 의미가 큰 이야기다.

배우로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을 확 넓힌 계기이기도 한 것 같다. 십 대 후반에 <여고괴담 4: 목소리>의 주연으로 데뷔했는데, 그동안 혹시 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던 적도 있나.
김옥빈
: 당연히 있다. 동생(연기자 김고운)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집에 온갖 연기 수업 책, 대본이 쌓여 있다. 요즘엔 체호프의 단편을 읽고 있던데, 솔직히 부럽다. 물론 어떤 분들은 현장에서 배우는 게 더 크다고도 하시지만, 내가 해보지 않은 경험이라는 면에서 궁금하다.

처음부터 현장에서 배우고 익혔던 사람으로서 동생에게 해준 조언이 있다면.
김옥빈
: 어떤 현장도 네가 연기를 집중해서 할 수 있는 환경을 완벽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스스로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고. 맨 처음 연기하던 순간부터 그걸 알았다. 내가 감정이 안 잡힌다고 해서 모두가 그걸 기다려주거나 조용히 해주는 건 아니다. 보는 사람도 너무 많고. 영화는 좀 낫지만 드라마는 시간이 너무 없다. 캐릭터에 깊이 들어가 감정적으로 확 연결됐을 땐 큐 하면 울고, 컷 하면 바로 다음으로 옮겨 가야 하는 상황이 스스로 기계처럼 느껴져 짜증스럽기도 하다. 배우도 일종의 감정노동자인데 그걸 겉으로 티 나지 않게 정리하고 계속해나가는 게 때로는 정말 힘들다. 하지만 최대한 집중하고 내가 연기할 감정과 상관없는 주위의 모든 것들을 신경 쓰지 않는 수밖에 없다.

연기를 떠나, 신인 시절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볍게 한 얘기로 오랫동안 비난받기도 했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옥빈 씨는 적립카드 얘기만 안 하면 완벽하다”는 멘션을 받고 “십 년 전 이후 해본 적 없음”이라고 답장했던데.
김옥빈
: 그분에게 <유나의 거리>를 추천하고 싶다. 사람은 늘 똑같지 않고, 늘 나쁘거나 늘 착하지도 않다. 누구나 항상 변하고 성장하는데 과거의 한 부분만 가지고 괴롭히는 건 좀 치사한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답장했다. 그분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까. (웃음)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 지나간 한순간이나 일면만으로 판단하기 쉽고, 그걸 잘 바꾸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오해를 가장 자주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걸러지나?
김옥빈
: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다른 거 같다. 나쁜 소리는 다 들을 필요가 없다. 어릴 때는 상처를 받았지만 지금은 그냥 장난도 치고 즐기는 편이다. Mnet <오케이 펑크> 때도 “니가 무슨 펑크야, 개XXX아!”라는 욕 멘션을 보낸 분이 있어서 “고마워~”라고 답장했다. 진짜 과도한 분노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유머러스하게 받아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넘길 수 있는 성격은 타고난 건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건가.
김옥빈
: 무뎌지는 거다. 직업 특성상 그런 일을 다 신경 쓸 수가 없고,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차피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는 걸 어느 순간 받아들였다. 나를 좋아하는 가족, 친구, 심지어 팬들도 있는데 나를 싫어하는 몇 명의 사람들 때문에 자존감을 잃고 괴롭힘을 당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뭐하러 모두에게 다 사랑받으려 하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일일이 해명해야 하나? 그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로 욕을 먹을 때는 나도 ‘어우, 진짜 엿이나 먹어라!’ 하고 지나가는 거다. (웃음)

그런데 <유나의 거리>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층위의 대중들로부터 호감을 얻게 된 것 같다.
김옥빈
: 유나는 거칠고 반항적이고 직선적인 것까지 나랑 정말 많이 닮았다. 나는 그런 면이 너무 안 좋은 부분이라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는데, 원래 내가 가졌던 모습을 유나로서 오픈해야 하는 순간이 온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모습을 연기로 보지 않고 나한테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도 했는데, 의외로 굉장히 큰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감이 막 생겼다. 그런 모습도 좋아해 주는 분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앞으로 나를 표현하는 데 있어 더 거침없어질 것 같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편협하다. 뭐든지 나 좋을 대로만 생각한다.

대중이 ‘여배우’에게 기대하는 태도와, 자신이 하려는 말이나 행동이 서로 충돌할 것 같을 때 망설이기도 하나.
김옥빈
: 그렇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면 내가 이성적인 사람이겠지. (웃음) 그나마 나이 들면서 요즘은 생각을 좀 하는데, 나는 원래 감정적인 사람이다. 전에는 좀 더 곱고 예쁘게, 말도 딱 가려서 하면 사람들이 더 나를 좋아해 줄까? 그래야만 하나? 같은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나는 그냥 이게 나라서 어쩔 수가 없다. 정말 마음이 곱고 예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포장 껍데기를 쓴 채로 사랑받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는 싫어하더라도 내 모습 자체로 사랑받고 싶다.

포장을 포기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의 양은 줄어드는 데 대한 아쉬움은 없나?
김옥빈
: 전혀, 내가 행복하면 된다. 최근 희준 오빠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책을 선물해줘서 읽었는데, 내가 내일 갑자기 죽을 수도 있고 70세까지 건강하게 산다 해도 남은 시간은 40년이다. 그러니까 지나간 일이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괴로워하기보다 지금 내게 보이는 아름다운 세상을 생각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매 순간을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정도의 자유를 100으로 놓는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로 살고 있는 것 같나.
김옥빈
: 70. 여기저기 혼자 잘 다니고, 발레도 학원 단체반에 등록해 배웠다. 열다섯 명 정도가 같이 하는 건데, 대놓고 막 아는 척하지는 않지만 중학생 친구가 끝나고 “언니, 수고하셨어요”라고 인사해주니까 굉장히 반가웠다.

나머지 30은 어떤 기준에 따라 참는 건가.
김옥빈
: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싫어서 어떤 자리에 아예 안 가거나, 정당하게 권리를 주장해야 할 부분에서도 시끄러워질까 봐 피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지금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게 살 것 같나.
김옥빈
: 밝고 건강하게, 여행도 더 많이 가고 연애도 실컷 하고 친구들도 더 많이 만나고 자유롭게 살 것 같다. 지금도 나름대로 밝고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행동의 제약이 사라진다면 더 좋겠지.

어떤 모습으로 나이를 먹고 싶은가.
김옥빈
: <유나의 거리> 김경철 촬영감독님이 30년 가까이 일을 해오신 분인데, 지금도 항상 새로운 장비나 기술을 공부하고 준비하신다. 유나랑 창만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마지막 장면까지 밧줄에 몸을 감고 열정적으로 촬영하시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희준 오빠한테 “우리도 나이 들어서 저렇게 일하자”라고 말했더니 오빠도 마침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거다. 그리고 우리도 감독님처럼 주위에 그런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자고 하더라. 나이 들어도 열정을 잃지 않고 원하는 일 제대로 하면서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 있게, 열린 마음으로 살고 싶다. 음, 그런데 지금 유나로부터 건강한 영향을 잔뜩 받은 상태라 더 이런 걸 수도 있다. (웃음)

글. 최지은
사진. 이진혁(스튜디오 핑퐁)
교정. 김영진
CREDIT 글 | 최지은
사진 | 이진혁(스튜디오 핑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