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력은 국력│② 전승택 “내 일은 오타쿠를 존중하고 사업적으로 활용하는 것”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

2013.08.29 페이스북 트위터
올해 상반기 가장 자주 쓰인 키워드를 꼽으면 단연 ‘진격의’가 아닐까. 동명의 원작 만화를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대중적인 코드의 소년 만화와는 거리가 먼 암울한 세계관과 잔인한 전투 묘사에도 불구하고 범대중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마니아와 대중의 영역이 교집합을 이루는 이 신드롬의 한 축에는 <진격의 거인>을 정식으로 구매해 일본과 단 며칠 차이로 방영하는 애니플러스 채널이 있다. 한일 동시 방영이라는 기조로 이미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에게 상당한 인지도를 쌓은 이 채널은, <진격의 거인>의 인기와 함께 단순히 협소한 마니아 시장에 갇히지 않고 그 시장을 조금씩 확장하고 있다. 스스로 애니메이션에 조예가 깊지 않다고 말하는 애니플러스 전승택 대표를 ‘덕력은 국력’ 릴레이 인터뷰의 두 번째 주자로 선택한 건 그래서다. 오타쿠보다는 전문 경영인에 가까운 그가 ‘덕력’ 충만한 직원들과 함께 애니메이션 시장을 양성화하고 새롭게 확장해가는 과정은, 대중문화 산업에서 ‘덕력’이 생산적으로 활용되는 새로운 모델을 보여준다. 과연 이 모델은 지금도 열심히 ‘덕력’을 쌓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비전을 보여줄 수 있을까.



올해 <진격의 거인>으로 대박을 쳤다.
전승택
: 일본에서도 이례적으로 생각할 정도다. 당장 SBS 뉴스에서 이 작품의 인기에 대해 다뤘으니까. 정말 운이 좋았다. 본방 평균 시청률이 0.5~0.7% 정도 나오는데 애니플러스 채널에 가입한 가구가 아직 적다는 걸 생각하면 상당한 수치라고 자평한다. VOD 판매 역시 굉장한 매출을 올렸고.

원작 판매 부수가 높은 작품이긴 하지만 <원피스>, <나루토>류의 소년 만화와는 거리가 먼 작품을 가져왔다.
전승택
: 사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일본 애니메이션 동시 방영 채널이라고 홍보를 해도 일반인 기준에선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른 채널은 <명탐정 코난>, <짱구는 못말려>, <원피스> 등이 있는데 우린 그런 게 없는 거지. 물론 <페이트 제로>나 <소드 아트 온라인>(이하 <소아온>)처럼 인기작은 있었지만 대중적으로 알려질 만한 타이틀은 아니었다. 그래서 채널을 대표할 작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고, 첫 기대작이 <쿠로코의 농구>였다. 농구니까 <슬램덩크>처럼 인기를 얻지 않을까 단순하게 생각했던 건데 그만큼은 안됐다. 그러다가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 제작 소식을 듣고 작년 가을부터 판권사와 미팅을 하며 강하게 구매 의지를 보여줬다. 사실 운이 좋은 게, 다른 애니메이션 채널에서 능력이 없어 못 산 게 아니라 채널 타깃과 안 맞아서 안 들여온 건데 대박이 난 거다.

타 애니메이션 채널보다 분명 더 마니악한 시청자들을 핀포인트 마케팅 하는 것 같다.
전승택
: 파트너와 함께 공동 창업했던 제이제이미디어웍스라는 회사에서 VOD 유통을 했는데 그런 마니악한 애니메이션, 우리는 하이에이지 애니메이션이라 부르는 작품에 대한 수요가 눈에 보였다. 사업을 크게 확장할 수준은 아니지만 판권료 대비 매출을 볼 때 분명 시장이 있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그냥 VOD만 파는 것과 TV 방영을 거친 VOD를 파는 건 파급력이 다르기 때문에 타 채널에 판매해 방송을 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 사업의 초기 히트작이라 할 수 있는 <제로의 사역마>는 애니맥스 채널을 통해 방영하기도 했고.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모든 작품을 타 채널에 판매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럴 바에 그냥 우리도 채널을 하나 론칭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TV는 좀 더 대중적인 매체니까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하이에이지 애니메이션 시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의미가 있었지.

<제로의 사역마> 이야기를 했지만, 채널을 개국할 땐 그런 ‘킬러 콘텐츠’로서의 작품 한 두 개가 필요하지 않나.
전승택
: 그게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미 유명한 소년 만화는 타 방송국이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우선은 양으로 승부하자는 생각이었다. 매 분기 일본에서 나오는 하이에이지 애니메이션이 20~30편 된다면 못해도 60% 이상은 확보하자고. 그러면 TV로든 사이트에서의 N스크린으로든, 애니플러스에 가입하면 웬만한 작품은 다 볼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양으로 승부하면서 <페이트 제로>나 <소아온>, 완전체 <진격의 거인> 같은 작품이 터지는 거고.

애니플러스에서 방영된 <진격의 거인>은 엔터테인먼트 전반에 걸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니악한 시장인 만큼 작품을 수급할 때 전문가적 감식안이 있어야 하는데.
전승택
: 그래서 정말 이쪽에 빠삭한, 오타쿠라 해도 좋을 직원을 세 명 채용했다. 처음 제이제이미디어웍스를 공동 창업할 때도 나는 사업적 측면을 담당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는 건 아니었다. 시장이 있다는 걸 알지만 고객 성향은 잘 모르는 거지. 그러면 고객 마음을 잘 아는, 고객과 친구이던 사람들을 직원으로 뽑아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덕력’이 채용 기준이 된 건데, 스펙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어떻게 가늠할 수 있었나.
전승택
: 가령 면접을 볼 때 일본에서 이슈가 되는 어떤 작품에 대해 세밀한 부분을 물어보거나, 90년대에 나온 작품인데 요즘 리메이크된 무슨 무슨 작품을 아느냐는 식으로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어려운 질문을 한다. 그러면서 직관적으로 상대방의 ‘덕력’을 가늠한다. 한 여성 직원은 코스프레를 좋아해서 본인이 코스프레한 사진을 이력서에 쫙 붙이기도 했고, 또 다른 직원은 자기 방 삼면을 피규어로 장식한 사진을 붙였는데 이 정도면 ‘덕력’은 확실하겠구나 하는 감이 오지. 물론 모든 회사가 그러하듯 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사회적 능력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뽑는데, 다행히 좋은 사람들 만나서 다들 장기근속하고 있다.

그럼 오타쿠가 아닌 본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전승택
: 좋게 말해 중립적인 시선일 수가 있다. 다들 직원이자 한 명의 오타쿠이다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성향의 작품 구매를 좀 더 강하게 어필할 때가 가끔 있다. 한 명은 타입문(시나리오 작가 나스 키노코가 만든 작품들이 공유하는 세계관) 마니아고, 누군가는 여성향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며, 또 다른 사람은 쿄애니(제작사 교토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통칭하는 말) 마니아다. 가끔 이 작품은 회사의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사와야 한다고 (웃음) 주장할 때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걸 한 두 개씩 골라낼 수 있다.

가령 작년에 <빙과>는 기대에 조금 못 미쳤고, <소아온>이 생각보다 히트했다고 알고 있다.
전승택
: 그때 직원이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가져오자고 한 게 <빙과>다. 사실 잘 안된 건 아닌데 기대치가 너무 높았다.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이하 <마마마>)와 <진격의 거인> 중간 즈음으로 되길 바랐는데 그만큼은 아니었던 거지. 반대로 <소아온>은 잘될 줄은 알았지만 지금 <진격의 거인>이 그런 것처럼 그 정도로 잘될 줄은 몰랐던 거고. 일본에서의 인기와 우리나라에서의 인기 사이에 온도차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장르가 한국에서 잘 먹히지 않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이제 조금씩 쌓여가고 있다.

사실 한일 동시 방영인 만큼 일본에서의 시청률 데이터가 없다는 위험 부담이 있다.
전승택
: 원작이 없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일 땐 제작자나 감독을 주로 보고, 원작이 있는 경우에는 일본에서의 판매 부수와 한국 정식 발매 여부, 그리고 한국에서의 판매 수치를 봐야 한다. 사실 어떤 작품을 가져오는지는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 <취성의 가르간티아>처럼 우로부치 겐이 쓴 작품이나 교토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작품, 아니면 원작 판매 부수가 높은 작품은 그냥 가져오는 거다. 문제는 무엇을 안 가져오느냐다. 우선은 민족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우익적인 작품과 아동청소년보호법에 걸리지 않는 작품을 조심해서 골라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대중적인 소년 만화는 검증되고 안전한 콘텐츠라 할 수 있는데.
전승택
: 그런 방향에 대한 확장의 필요성은 느낀다. 사실 방송 채널인 만큼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와야 한다. <뽀롱뽀롱 뽀로로>나 <변신 자동차 또봇>처럼 시청률이 잘 나오는 저연령대 콘텐츠를 대량 편성해서 시청률을 끌어올릴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러면 채널의 색깔을 확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국내 파트너를 통해 <원피스 3D: 밀짚모자 체이스>나 <테니스의 왕자> 같은 소년 만화 극장판을 가져와봤는데, 시청률이 잘 나오더라. 그런 식으로 기존 채널의 색깔과 접점이 있는 상태에서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이에이지 애니메이션이라는 시장을 지키면서 수익성도 확대해야 하는 건데, 지난 7월 <마마마> 극장판을 배급하며 전 좌석을 선구매한 뒤 팬들에게 티켓을 판매한 방식이 흥미로웠다.

전승택
: 수치적으로 좌석 점유율이 90%를 넘겼으니 잘된 건데, 아쉬운 건 이 정도 점유율을 기록해도 상영관을 더 늘리긴 어렵더라. 블록버스터가 나오는 성수기이기도 했고. 사업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항상 고민이 된다. 수익이 날지도 모르겠고 그냥 고생만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도 항상 결론은 우선 해보자는 쪽으로 간다. 일단 고객의 반응을 보고 그들이 만족스러워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면 수익성은 다음에 다시 전략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이에이지 애니메이션 마니아 시장이 아직 무주공산에 가까운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시도들이 의미 있는 첫 걸음이 될 것 같다. 그러면서 다음 번, 다다음 번에는 규모도 키우고 수익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지.

가령 아직 의문 부호였던 N스크린 서비스를 굉장히 일찍 성공시킨 케이스다.
전승택
: 그게 없었다면 신생 채널로서 이 정도로 고객들에게 파고들 수 없었을 거다. 초반에는 그런 얘기가 있었다. 당장 우리 집에는 애니플러스 채널도 안 나오고 따로 VOD 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저작권만 단속하면 어떻게 보고 싶은 작품을 보느냐고. 그렇다면 집에 방송이 안 나와도 편히 볼 수 있는 시스템을 제공하겠다고 화답한 거지. N스크린 서비스 구축에 있어서는 시장을 선도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애니메이션 사업을 다각화하는 만큼 머천다이징 시장에도 관심이 있을 것 같다.
전승택
: 강화하고 싶긴 한데 잘 안 따라와 준다. 사이트에 쇼핑 섹션이 있지만 지속적으로 잘 판매되진 않는다. 그에 반해 <마마마> 상영회를 했을 때 현장에서 상품이 팔리는 건 생각보다 볼륨이 크더라. 아이들은 친구가 뽀로로 그려진 가방을 사면 나도 저걸 사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그에 반해 하이에이지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은 그보다는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소위 ‘레어 아이템’을 원하기 때문에 누구나 항상 구매할 수 있는 인터넷 쇼핑에는 매력을 많이 못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오프라인에 와서 보고 즐기고 쇼핑하는 공간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아예 300석짜리 소규모 상영관도 만들어서 우리가 배급하는 극장판만 계속 틀어주기도 하고.

말하자면 애니메이션계의 스폰지하우스 같은?
전승택
: 그런 거지. 와서 애니메이션 문화에 취하고 조금 이완된 상태에서 쇼핑도 하고. (웃음) 코믹월드처럼 한시적으로 열리는 행사가 아니라 이 공간 자체가 한국 오타쿠의 성지가 되어 다들 와서 노는 곳이 되면 어떨까 구상해보고 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본인은 오타쿠가 아니면서 한국 오타쿠 시장을 개척하는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전승택
: 나는 오타쿠가 아니지만 오타쿠 직원에게 이러이러한 비전을 제시해줄 수는 있다. 그들의 열정을 존중하는 동시에 개인적 열정에 그칠 수 있는 걸 사업적 차원으로 활용하는 거다. 진짜로 오프라인에 매장을 만들면 당장 고객들과 대면할 직원 역시 ‘덕력’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식으로 고용 창출도 되고 이 시장 전체가 커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교정. 김영진

CREDIT 글 | 위근우
사진 | 이진혁(스튜디오 핑퐁)